조선 말기, 억압받던 여성의 삶

[ 여전도회 ] 작은자운동 45년 : 작은자복지선교회의 교회사적 의미 1

이치만 교수
2020년 03월 31일(화) 08:26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이라면 반드시 전해졌고 또한 많은 역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런 역사는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작은자복지재단'이 바로 그 역사의 증인이다.

이 일은 1974년 독일의 아동복지 재단 KNH(Kindernothilfe V.: 킨더노트힐페)가 청계천의 열악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후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일은 1986년 '작은자운동'으로 나아갔고, 1992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작은자복지선교회' 사업을 전개하면서 그 역사를 발전시켰다.

이에 대한 역사적 전개과정은 '작은자복지선교회 20년사'(작은자복지선교회, 1996), '작은자복지선교 40년사'(작은자복지재단, 2014)에 이미 상세히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새롭게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본 논문은 하나의 질문, '여전도회가 "작은자 운동"에 투신한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필자는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사에서 과거의 두 장면을 소환해 여전도회가 계승한 '작은 자 운동'이 갖는 교회사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기독교 전래와 여성의 존재성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근대계몽기는 우리의 근대가 시작된 '기원의 공간'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거의 대부분 근대계몽기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에 비로소 근대계몽기가 본격적으로 약동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근대계몽기에 이전에 없던 새로 주체가 등장하였는데 바로 여성이었다.

근대계몽기 이전 조선말기의 일반적인 여성의 삶을 압축하면 '폐쇄'와 '억압' 그리고 '이름 없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폐쇄'는 양반가문 여성일수록 매우 엄격하게 적용됐다. 기독교 전래초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양반가문 출신 전삼덕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옛날 양반집 풍속에는 여자가 문밖출입을 하려면 반드시 보교나 가마를 타고 앞에 하인을 세우고야 출입을 하였으므로 문벌이 가진 가문에 태어나 그와 같은 양반집으로 가서 살게 된 나는 좀처럼 문밖출입을 할 수 없었다. 그럭저럭 내 나이 많아가니 남편 보기에 젊어서만치 아름답지 못하였던지 그는 첩을 얻어 살며 나를 모른 체하므로 나는 자연히 쓸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또한 조선 여성의 삶은 폐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억압적이기도 했다. 남편이 외도를 하거나 첩을 두어도 불평하거나 문제제기할 수 없었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풍습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이런 풍습은 양반가문의 여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계층의 여성에게 적용됐다. 만약 결혼한 여성이 시가에서 내쫓기거나 남편이 사망하여 혼자가 됐을 경우, 즉 과부가 됐을 때에는 다른 남성이 그 여인을 납치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전도부인 김세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세디(김세지를 지칭) 나이 열아홉 살 때, 그보다 나이 어린 남편이 죽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와서 그를 친정으로 데려가려 했다. 어머니와 함께 친정으로 가던 중 어느 마을에 들렀는데 거기 살고 있던 친척 남자가 다음 마을에 세디를 채가려는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자기 집에 숨으라고 했다. 강도떼를 무서워했던 어머니는 시키는 대로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 친척은 나쁜 사람이라 강제로 세디를 아내로 삼았다. 세디는 그 남자와 3개월 동안 억지로 살다가 그가 살인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자 그 집을 도망쳐 나왔다. 그때는 어디 젊은 과부가 있다는 소문만 나면 장가들려 하는 홀아비가 사람을 많이 데리고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와서 없어다가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고 또 여자가 아무리 살기가 싫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업혀가서 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업어갈 때에 만일 과부가 싫다고 소리를 지르면 입을 막아서 말을 못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이같이 위험한 시대에 태어났다가 불행히 청춘에 과부가 된 탓으로 신변에 위험한 일과 고생도 많이 겪으며 지내었다."(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이에 대해 '한국천주교회사'를 집필한 프랑스인 신부 샤를르 달레는 조선의 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반려가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고, 쾌락이나 노동의 연장에 불과하며, 법률과 관습은 여자에게 아무런 권리도 부여하지 않고 말하자면 정신적 존래로 인정하지 않는다. 남편이나 부모의 지배 아래 있지 않는 여자는 누구나 주인 없는 짐승처럼 먼저 차지하는 사람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법정에서도 공인된 원칙으로서, 논박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의 인격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치만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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