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가득한 책을 쓰는 이유

[ 기독교문학읽기 ] (16)천희란의 '영의 기원'

김수중 교수
2020년 03월 11일(수) 10:00
죽음이라는 주제 앞에 서게 될 때 비로소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가능하다. 이 소설집을 읽으며, 필자는 한국문학에서 죽음을 무겁게 다룬 두 편의 글을 떠올렸다. 먼저,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그는 고국을 떠나 먼 나라 캐나다에서 병원 시체실 청소부 일을 하면서까지 죽음에 다가갔고,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탐구에 진력했다. 그 결과물로 얻은 소설에서 작가는 기독교적 사유 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불교와 원시종교의 세계를 넘나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작가의 방대한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죽음 자체는 독자들의 가슴에 처절한 고뇌의 문제로 좁혀졌다. 최근 김영현 작가는 '죽음에 관한 유쾌한 명상'이란 에세이집을 내고 죽음이 삶의 위안이 되는 깨달음을 전해 주려 했다. 그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은 죽음에서 유쾌한 느낌을 받았다기보다 삶을 성찰한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위의 두 작품을 크리스천 문학의 영역 안에 둘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아울러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영의 기원'도 이런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천희란(1984~ )이라는 젊은 작가가 처음으로 낸 이 소설집은 죽음의 주제를 다룬 근본 바탕에 영혼과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정신이 깔려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에 관한 기독교적 탐구를 시작한 이 작가는 인간 정신의 구원이라는 길 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집은 천희란 작가의 단편소설 8편을 한데 묶은 책이며, '영의 기원'은 표제작으로서 죽음의 성찰에 대한 일종의 예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은 죽은 친구의 이름인 한자 '영(瑩)'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영(0)'이기도 하며, '영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0시는 자정인데 마치 시간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식된다. 영은 돌아갈 길을 걱정하지 않은 채로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인식이다. 그런데 이 소설보다 크리스천에게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관한 단편은 '예언자들'과 '신앙의 계보'라는 두 작품이다.

'예언자들'은 종말의 날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사형을 당하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남자는 구원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의미의 깨달음 속에서 종말을 기다린 여자는 일종의 자기 구원에 매달린다. 그들은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예정된 종말과 약속되지 않은 구원을 기다리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신앙의 계보'에서 다루는 주제는 '사회적 약자가 강요받는 부당한 죄의식'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P신부는 사제가 되었으나 마음 한구석에 항상 무거운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 까닭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사회적 약자로서 강요받는 죄의식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P신부는 따돌림을 당하는 한 아이에게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본다. 그는 부당한 죄의식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으며 죽음의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 젊은 작가가 죽음으로 가득한 소설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는 "언제나 끝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내심은 그 끝이 멀리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죽음에 대한 답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구원을 이루는 그 끝을 향해 발을 내디디고 있지만, 그 지점이 멀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인생의 고통을 힘겨워하는 경우가 많다. 구원의 진실과 깨달음을 아직 모른다고 겸손해하는 작가와 함께 우리도 죽음 앞에 겸허한 자세로 서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려야 할 사람들이다.



김수중 교수/조선대 명예, 빛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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