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자의 복

[ 기독교문학읽기 ] (15) 안소영의 '시인동주'

김수중 교수
2020년 02월 12일(수) 10:00
올해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시는 시대와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슬픔과 절망을 선한 마음으로 이겨내려 하는 사람, 십자가를 바라보며 지나온 삶을 참회하는 크리스찬들의 가슴에 지금도 한 줄기 샘물로 솟아나고 있다. 안소영(1967~ )의 장편소설 '시인 동주'는 5년 전, 그의 70주기를 맞아 출간된 추모의 업적이다.

윤동주 시인에 관한 연구 성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깊이가 더해지고 있다. 최근의 대표적인 것들로 송우혜 작가의 '윤동주 평전(개정판)'과 권영민 교수가 엮은 '윤동주 전집'이 눈에 띈다. 송우혜 작가는 역사학자이며 윤동주의 분신인 송몽규의 조카로서 30여 년에 걸친 작업 끝에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평전을 내놓았으며, 권영민 교수의 전집은 윤동주의 시 97편과 산문 4편을 모아 해설과 연구논문을 수록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일본 법정의 판결문, 그리고 가계도와 연보가 촘촘히 실렸다.

이런 객관적인 자료들이 그의 삶의 궤적을 넓혀주고 있는 한편, 여기 안소영의 소설은 청년 윤동주라는 존재와 일체감을 이루면서 그의 숨결과 정신,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회복, 그때마다 상황에 작용하는 시 창작의 결실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전기나 해설에서 맛볼 수 없는 소설만의 묘미라 할 것이다. 작가는 생생하고 유려한 필치로 윤동주의 시와 삶에 감각적으로 접근했다.

1938년 3월, 연희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성역에 내린 날부터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어느 외로운 감방에서 별 하나에 새긴 어머니를 부르며 떠나간 그 날까지 7년에 걸친 동주의 삶이 그의 자작시와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동주가 중학 시절부터 시 없이 살아본 적이 없고 그래서 자신의 체온 같고 맥박 같고 피돌기 같고 숨쉬기 같은 것이 바로 시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의 문인들은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며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일들을 저질렀다. 이것을 보고 절망한 동주가 시 쓰기를 멈추어 버리자 피가 멈추고 숨을 쉴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이 찾아왔다. 작가는 동주와 함께 어둠보다 더한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이 소설은 동주에게 다시 생명을 준 것이 슬퍼하는 자의 복이라고 일러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군중에게 들려주신 산상설교의 팔복(八福),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그를 위로하였다. 동주의 여덟 가지 복은 모두 슬퍼하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슬픔의 웅덩이 깊은 곳까지 닿았던 동주의 절망은 슬픔의 시대를 이기며 새로이 시로 움트게 되었다.

그렇다고 작가가 식민 시대의 교회를 우호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다. 신앙과 애국을 별개로 놓고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총독부의 강요에 눈과 입을 닫고 있는 교회,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을 나무라며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무능하고 게으른 민족의 원죄라고 말하는 교회의 비겁함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크리스찬이었던 동주의 눈에는, 그때 뵙던 그리스도가 이천 년 전 십자가의 길에서만이 아니라 식민지가 되어 버린 조선 땅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물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다.

'소설 동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친숙한 실존 인물들이 동주와 생생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인물들에게서는 한결같이 정겨운 마음속에 시대의 아픔과 존재의 서러움이 느껴진다. 동주와 함께한 인물들은 슬퍼하는 사람들이며, 십자가가 허락된 사람들이고, 별 하나에 사랑과 쓸쓸함을 간직한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이다.



김수중 교수/조선대 명예·빛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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