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앞에 정직할 때 가질 수 있는 '얼굴'

[ 루이스다시읽기 ] <15> 루이스의 문학과 얼굴(face)

이인성 교수
2019년 12월 17일(화) 08:00
루이스 상상력의 정점은 <나니아 연대기>의 '나니아'도 아니고, 우주 삼부작(Space Trilogy)의 '페렐란드라'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얼굴'이다. 루이스가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Till We Have Faces)(1956)를 마지막 소설로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오랫동안 사색하고 숙성시키면서 특별히 심혈을 기울였으며, 자신이 쓴 많은 책들 중에서 최고(best)이고 가장 좋아하는(favourite) 작품이라고 반복해서 말한 바 있다. 그가 이 작품을 후에 아내가 된 조이(Joy Davidman)에게 헌정한 것을 보아도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는 크리스천 작가이자 학자인 루이스의 글쓰기 방식과 주요 아이디어들이 집대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고 연구가 미흡한 작품이다. 이에 이 작품을 중심으로 '얼굴'의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책의 부제가 <다시 쓴 신화>(A Myth Retold)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기존의 큐피드(Cupid)와 프시케(Psyche) 신화를 루이스 특유의 방식으로 재가공하여 자신의 사상을 완성시킨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신화는 시간과 장소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보편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보다는 사건 즉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더욱 관심을 집중한다. 하지만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는 전혀 다르다. 이 소설에서 시간과 장소는 구체적이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아주 크다. 루이스는 한 편지에서, 이 책은 "일종의 역사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말하며, 배경인 시간과 장소의 무게를 강조하고 있다.

루이스가 쓴 대부분의 작품들은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3인칭 화자(narrator)가 독자들에게 믿을 만한 관점과 정보를 제공한다. 루이스 문학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 까지>는 예외이다. 언니인 오루엘(Orual)이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확신하는 것과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할 만한 설명, 그리고 신들이 자신을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게 대해 왔는지를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녀의 실수와 자기기만을 깨닫게 된다. 놀랍게도 작품 안에서 믿을 만한 화자의 도움 없이도 독자 스스로 이 일을 해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1인칭 화자인 오루엘은 믿을 수 없는 화자였다. 전체 내러티브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루이스가 쓴 다른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획기적인 새로운 시도였다.

오루엘은 오랫동안 불평해왔던 답을 결국 찾았다: "왜 신들은 우리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지 잘 알았다 …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 신들은 어떻게 우리들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겠는가?(How can they meet us face to face till we have faces?)" 이 소설의 제목은 바로 여기서 가져온 것이다. 해답을 찾아 길고 긴 여행을 떠났던 오루엘의 마지막 고백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첫 번째 책을 무응답(no answer)으로 끝냈습니다. 주님, 당신이 왜 대답하지 않으시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 자신이 바로 응답입니다. 당신의 얼굴 앞에서 질문은 다 사라집니다. 어떤 다른 대답이 더 필요할까요?" 얼굴 앞에서 즉 얼굴을 볼 때 질문은 없어지고 더 이상의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게 된다.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루엘은 곧 루이스 자신이다. 오루엘의 이야기는 루이스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우리들은 오루엘처럼 얼굴이 없거나(no face) 천의 얼굴을 한(a thousand faces) 존재들이다. 마치 우리가 불(fire) 앞에 서면, 변화무쌍한 불빛들로 인해 얼굴을 볼 수 없거나 다양한 많은 얼굴들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신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정직할 때, 다시 말해, 자기기만과 자기 의의 베일을 벗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만)의 얼굴을 가질 수 있다. 그때까지, 즉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 우리는 신의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루이스가 자신의 마지막 소설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생각하라, 프시케. 아름다운 어떤 것도 그 얼굴을 감추지 않는다. 정직한 어떤 것도 그 이름을 감추지 않는다 … 생각하라." 지면 관계상 여기서 더 깊이 다루지는 않겠지만, '얼굴'은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 뿐만 아니라 <나니아 연대기>를 포함하여 루이스의 모든 작품에 깊숙이 녹아있는 핵심 사인(sign)이고 메시지이다.

오루엘은 드디어 얼굴을 가졌다. 즉 분명한 자아(I)를 찾은 것이다.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 우리는 진정한 정체성과 참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만)의 얼굴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그 얼굴은 어떤 모습인가? 혹시 천 가지의 얼굴은 아닌가?

이인성 교수 / 숭실대 베어드교양대학 학장·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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