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연재 '작은자운동 45년'

[ 여전도회 ]

한국기독공보
2019년 11월 28일(목) 10:05
3. KNH와 한독아동복지선교협의회

황화자 전도사는 KNH의 코디네이터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어린이집들을 돌아 볼 뿐만 아니라 독일 KNH로부터 한국으로 송금되는 부분을 일원화 하여 단일 창구를 만들었다.(이명숙 원장 면담) 또한 한국에서의 활동이 원활한 유기체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한국과 독일이 함께 한국의 소외된 아동들을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1981년 KNH-한국협의회를 발족하고 이의호 목사가 초대위원장직을 맡았다. 1983년에서 1984년에는 기장 총회장을 지냈던 이국선 목사가 2대 위원장, 1984년부터 1985년에는 구세군 사관인 권태훈 서기관이, 1987년에는 예장통합의 유의웅 목사가 위원장직을 승계하였다. 1982년 1월 명칭을 "한독아동복지선교협의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작은자운동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에큐메니칼운동으로 펼쳐진다. 이 때에 각 교파가 자신들의 색깔을 가지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사회복지의 틀을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4. 어린이집과 교사교육

작은자운동에서 청계천에서의 초기 어린이집과 방과 후 학교는 아이들이 방치되는 것을 보면서 교육, 문화, 보건 등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한 부분들을 지원하였다. 또한 어린이집 교사들은 이화여자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의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한 교사들이 참여함으로써 아이들을 맡기는 부모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남양만으로 이주하면서 어린이집 교사들을 남양만지역에서 수급해야 했으며, 지속적인 교사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남양만으로 이주해서도 독일 KNH의 지원이 지속되었고, 지역의 어린이집 시설을 확장해 감에 따라 정보 교류 및 어린이집을 이끌어 갈 때에 지역사회와의 연계방안과 커리큘럼 개발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어린이집 시설장들의 정기모임을 갖게 되었고, 시설들이 필요로 하는 교사의 자질을 높이기 위한 교사교육을 년 2회 정기적으로 실시하였다. 장소는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 지역의 교회에서 개최되었으며, 교사교육을 통하여 교육에 대한 커리큘럼 개발과 주제에 맞는 교재들을 발간하고, 그에 따른 교사교육이 진행되었다. 이 일에 장안제이유아원에 박성호 원장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더 나아가 김영옥 간사를 독일로 보내 상황중심교육을 배우게 하여 한국 상황에 맞는 그리고 한 주제를 가지고 도시, 농촌, 탄광촌, 어촌 등 각 지역사회에 맞는 상황 중심교육을 펼쳤다. 교육의 커리큘럼이 발전하면서 교사교육은 수준이 높아졌고, 자체적으로 박사학위를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당시 영송학생의집 송재숙 교사를 1호 박사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5. 결연후원 사업

1984년 황화자 총무가 멕코믹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시카고연합장로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리고 시카고연합장로교회의 몇몇 권사님들과 작은 기도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에는 뜻밖의 사람이 함께한 기도모임이었다. 그는 한국의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렸던 영암교회 故 황광은 목사 사모 김유선 여사였다. 황광은 목사와 김유선 사모는 6.25전쟁 당시 난지도에서 고아들을 위한 공동체를 세워 난지도공화국을 만들었고, 미군에게 고아들을 제주도로 수송하는 작전을 건의하여 고아들을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역할도 감당하였다. 김유선 사모는 남편인 황광은 목사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세탁소를 운영하며 자녀들을 키웠다.

기도모임에서 김유선 사모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황화자 총무가 한국에 돌아 가면 작은자들을 더 잘 돌보도록 부탁하고, 자신과 기도모임에서 매월 한국의 작은자들을 돕겠다는 약속을 한다. 황화자 총무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김유선 사모는 동료 권사들과 20불씩 모금하여 매월 60불을 한국에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으로부터 후원금이 입금되면서 자체적 모금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 후원금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논의 끝에 후원금은 아동과 후원자와의 1:1 결연을 맺어 지원하기로 하였다.

미국에서의 후원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모금 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1987년 4월 노량진교회, 연동교회, 종암교회를 중심으로 작은자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후원회 초대회장에 노량진교회 백옥숙 권사를 선출하고, 본격적인 국내 모금을 시작했다.

작은자후원회는 시카고의 김유선 사모를 중심으로 시작하여 결연사업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후원회를 통한 모금 계획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작은자후원회가 활성화되고 1993년 작은자복지선교회와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병합되면서 잠시 침체기를 맞는다. 작은자후원회는 KNH의 후원의 성격과 연속성을 같이하면서 초교파적인 모금과 지원을 펼졌으나, 여전도회전국연합회와의 병합 이후 후원회 구성원인 남자 목사님들과 예장통합측이 아닌 외부 후원회 회원들이 후원회의 구성원에서 빠져나가고, 순수하게 예장 통합측 여성들로만 구성되었다. 또한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사회부장이 당연직으로 후원회 대표회장을 맡게 되었다. 모금에 있어서도 배당문화에 익숙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와는 다르게 강요되지 않은 순수한 모금으로 자리잡기까지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이 문제를 헤쳐가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당시 여전도회 53연합회 조직 내에 작은자복지부 부서를 둘 수 있도록 제안하여 1994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총회에서 승인을 얻었다. 몇 년에 걸쳐 지연합회 내에 작은자부장과 차장을 두어 해당 연합회 내에서 작은자운동에 전념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인지도가 없는 부서여서 여전도회 활동에 이름만 걸어놓는 사람에게 맡기거나 연합회에 내에서 영향력이 약한 사람에게 맡기면서 활성화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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