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의 신앙과 생애

[ 제56회 언더우드 학술강좌 발제문 발췌 ]

최은숙 기자 ches@pckworld.com
2019년 09월 20일(금) 16:12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선생(맨 앞줄 오른쪽). 출처:Wikipedia
지난 8일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56회 언더우드 학술강좌에서 '김규식의 신앙과 생애'를 주제로 발제한 윤경로 전 총장(한성대)의 발제문 일부를 정리했다.



김규식의 신앙과 학문 그리고 항일민족운동



우사 김규식은 한국현대사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민족운동가이지만 평생 동안 기독교적 정체성을 견지했던 신앙인이었다. 유년시절 선교사 언더우드 밑에서 성장하면서 기독교인이 된 그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20대 청년시절 10여 년 동안 새문안교회의 제직으로 교회를 섬기는 동시에 경신학교 흥화학교 등의 학감과 총교사로 교육활동에 진력했고 또한 YMCA 교육간사 및 연사로 사회 계몽운동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1910년 29세 되던 해 새문안교회 장로에 장립된 그는 1911년 경기충청노회 서기로, 이듬해 장로회총회 결성에서 전국주일학교연합회 부회장 등으로 교회 일에 진력하였다. 그 후 우사는 1913년 33세 되던 해 독립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32년간의 해외 망명생활 속에서 신앙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해외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신앙을 지켜 환국 후 혼란한 정치계와 기독교계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듯 우사 김규식의 신앙은 자신의 개인적 신앙을 뛰어 넘은 성숙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으려는 돈독한 신앙심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문제, 정치현실 문제 등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볼 만큼 독실한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평생 동안 개인적 이해관계보다 민족과 나라를 우선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신앙한 기독교의 영향이었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사 김규식은 한국현대사의 정치사적 인물로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낳은 대표적인 기독교계의 신실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라 하겠다.

한편 김규식은 1913년 상해로 망명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 상해 임정 외무총장, 학무총장, 구미위원부 위원장,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 의장,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상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조선민족혁명당 주석, 그리고 중경 임정 부주석을 거쳐 환국 후 좌우합작운동과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운동 등 평생을 민족문제에 진력한 민족운동 지도자였다. 병약한 몸으로 엄혹한 이국땅에서 32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을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생애는 이 점을 잘 시사해준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여러 형태로 전개된 한국독립운동사라는 큰 틀에서 김규식의 독립운동 양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우사, 김규식은 외교독립론에 토대한 항일독립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 구미위원부 활동, 그리고 모스코바 극동민족대회 활동과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결성 및 통일전선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큰 틀에서 그의 운동노선은 구미열강과 코민테른 및 소련을 상대로 '탄원과 호소' 중심의 외교독립활동이었다는 특징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어느 특정한 노선과 이념이나 종교 그리고 인맥과 지맥과 학맥 등에 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는 그때그때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본인이 가장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입장과 노선을 취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당성을 극복한 흔치 않은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개인적 욕망이나 정치적 야심에 매이지 않았다는 점과 그가 매우 이성적이며 합리적 사고의 학자형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엄격히 구분하자면 그는 상대적으로 다른 우익 정치인에 비해 진보적인 노선을 견지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22년 모스코바 극동민족대회 참가에서 보듯 그는 한국 독립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면 공산당의 '후보당원'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기독교인이었다.

이 밖에 일반 대중과의 접촉을 꺼려한, 대중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한 특징이자 한계라 하겠다. 이 점은 광복 이후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혀야 할 기자단의 요청을 여러 번 회피한 태도에서 잘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와 특징은 김규식이 평생을 민족문제에 투신한 독립운동가였지만 태생적으로 '전업적인 독립운동가'도 '직업적인 정치인'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엄밀히 말해 김규식은 독립운동가와 정치인 이전에 교육자이자, 신앙인이었다. 32년간의 중국 망명생활 중 교수, 저술가, 학자로서 활동한 기간을 합산해 보면 무려 20여 년에 해당된다. 이렇게 볼 때 그는 본직을 교육활동에 두고 나머지 시간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보아도 크게 어긋날 것 같지 않다. 이 점과 관련해 1922년 모스코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50여 명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직업을 '교육사업'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도 자신의 정체성을 교육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김규식은 '전업적인 독립운동가', '직업적인 정치가'가 아니었기에 특정한 정파에 경도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고 발언했던 한국근현대 사상(史上) 흔치 않은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해방 후 남과 북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채 6.25전쟁 와중인 1950년 9월 27일 인민군에 납북 당해 그 해 12월 12일 평북 개천(价川))을 지나 국경 접경 북단인 만포진(滿浦津)에서 '중간자'의 외로운 삶을 마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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