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기억

[ 주간논단 ]

김은주 교수
2019년 08월 20일(화) 10:00
한 동안 잊고 살았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땀과 피를 흘린 많은 이들의 덕분이라는 사실, 그리고 시시탐탐 우리나라를 엿보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기회를 노리는 이웃 나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제강점기에 중국, 일본, 동남아, 러시아 사할린 등의 전쟁터로, 공장으로, 탄광으로, 공사장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에서 숨진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이야기들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의 활동을 격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빨리 잊어버리기를 바란다. 교사들도 보통 평범하거나 덜 도발적인 주제에 교육의 초점을 맞추도록 유혹을 받는다. 아마도 고통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도 실은 현재의 모습 속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따로 떨어져 있는 수직적 개념이라기보다 한데 어우러져 있는 수평적인 것이고, 현재의 우리를 돌아볼 때 우리 안에 내재하는 과거라는 부분을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실 잊힌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억하는 활동은 교육적인 잠재성을 지니며 신학적 성찰에도 중요한 것이다. 종교교육학자 토마스 그룸은 현 상태에 만족함을 깨뜨리며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개인적 혹은 공동의 기억을 위험한 기억이라고 부른다. 그런 기억들은, 성경의 출애굽기 이야기처럼, 현상유지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타협에 도전하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기억하게 하고,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다시 헌신하도록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들을 노예생활에서 구출했는지를 히브리 민족이 피상적인 회상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억했을 때, 그 기억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에 다시 초점을 맞추도록 도와주었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사람들로 자유하게 사는 것에 다시 헌신하게 도와주었다. 그러므로 그런 기억의 행위는 현 상태에 만족하는 것과 적당한 타협에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기억하는 활동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러 기억들이 개인 자신을 구성하고, 삶 속에서의 사건을 기억할 때마다 자신이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억의 활동은 자신을 재구성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기억과 관련해서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바로 용서의 문제이다. 용서란 무엇이 행해졌는지를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용서는 악한 행동이 관계에 더 이상 장애물로 남아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100년 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를 민족의 현실과 연결시켜 이해했다. 복음을 말로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심층적 관심과 실천은 삶 속에서 경험하는 중요한 이슈들을 포함해야 한다. 대부분 잊혀져 있는 기억들. 그러나 지금 불러일으킨다면 우리에게 새 삶과 희망을 가져올 것이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인 '정한론'을 추종하며 남의 나라를 침범한 것을 합법으로 여기는 무례함의 극치를 보이는 이들, 그래서 전 인류사회의 평화를 위협할 소지를 지닌 이들이 그 속내를 교묘하게 드러내는 요즈음, 우리는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적 진실을 우리의 기억 속에 새겨야 한다. 꾸준히 이성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그 진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김은주 교수/한일장신대학교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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