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신앙과 민족적 정체성

[ 특집 ] 나라사랑을 위한 선교적 과제

최형근 교수
2019년 06월 17일(월) 11:21
콘스탄틴 황제가 AD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포한 이래 크리스텐덤(Christendom, 기독교 국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거의 300년 동안의 오랜 박해와 고난의 터널을 지나온 초기 교회는 기독교 왕국을 환영하며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와 혜택을 누렸다. 황제는 국가권력의 정점에서 신격화된 존재로 인정을 받았고, 교회는 국가체재에 편입되어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신정정치의 이상을 구현하려고 끊임없는 권력을 탐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중세 천 년 동안 지속되면서 국가종교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국가종교는 유럽 기독교의 신앙을 규정하며 기독교의 세계관적 전제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럽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크리스텐덤 세계관은 북미로 이식되어 기능적 기독교 왕국(functional Christendom)의 형태를 띠고 그들의 무의식에서 작동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 왕국 시대를 지나 후기 기독교 왕국(post Christendom)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미국사회가 추구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종교 활동을 금하는 것과 종교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는 원칙이며, 국가가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세속국가의 유지를 보장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정교분리는 결국 기독교 왕국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능적 기독교 왕국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한국역사에서 주로 우파 정권들은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한 기능적 방편으로 기독교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한기총 대표인 전광훈 목사가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범주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전광훈 목사가 갖고 있는 의식구조의 저변에는 기독교를 국가와 동일시하려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국가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겠다는 왜곡된 사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교회와 기독교의 이름으로 세워진 정권의 관계가 밀접해질수록 하나님 나라는 권력을 향한 의지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성경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열방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는 백성으로 규정된다.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구약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인간이 만든 신들을 섬기며 우상숭배를 하는 민족 국가들에 의해 둘러싸여 항상 위협을 받았다. 분명히 이스라엘의 야훼신앙과 로마제국의 국가종교 형태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야훼 하나님은 온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언약백성을 삼으시고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시범적 백성으로 보내신 선교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이라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교회가 갖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애국애족 정신은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만일 교회가 국가의 비인간적 압제와 도덕적 타락에 대해 묵인하고 개인의 영혼의 문제나 인간의 내적인 문제를 다루는 제도적 기관으로 축소된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다. 초대교회가 끊임없이 추구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단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적인 영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포함하는 모든 세계질서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관점에서, 교회는 공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반영하고 예수 따름의 모습을 구현해야 한다. 즉 세계 시민으로서 뿐 아니라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민족적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백성의 정체성에 의해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본질적 목적을 추구한다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가운데 반영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이 우리의 문화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국가와 민족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하늘이 이 땅으로 내려오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모든 공적 영역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와 민족이 하나님의 정치와 하나님의 경제를 포괄하는 하나님의 생태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이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난 지 어언 69년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기억과 회상'에 근거한다.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와 수치의 역사 그리고 분단의 아픔을 지닌 역사는 기억의 창고에 켜켜이 쌓여 있어서만은 안 된다. 모든 기억들이 먼지를 털고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 반영되고 회상되어야 한다. 일본의 수치스러운 과거사를 집요하게 침묵하거나 비켜가려는 일본의 아베 총리와 극우정치가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과 범죄에 대한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없는 인간실존의 위선과 가벼움에 치를 떨 수밖에 없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독일의 노벨상 문학가인 귄터 그라스(Gunter Grass)는 생전에 나치 역사에 대한 직시와 반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그라스는 79세인 2006년 자전소설 "양파 껍질을 벗기며"에서 자신이 10대 시절 나치 무장친위대의 일원이었음을 고백해 파문을 일으켰다. 여든이 다 된 나이까지 60여 년 전의 죄책감을 멍에처럼 가슴에 담아 두었던 그는 노벨상 문학가라는 명망과 평판을 내려놓고 기꺼이 세상의 비난 앞에 섰다. 그는 회상과 고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우리에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 그의 고백을 들으며, 그라스의 죄책감과 책임의식은 동일하게 일제 강점기와 전쟁, 분단 상황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교훈을 준다. 요즈음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위선과 가식, 그리고 부정에 대한 질책이 고조된 지 벌써 오래다. 대다수의 해당 목회자들은 부인과 모르쇠로 일관한다. 문제는 그러고도 전혀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어쩌다 한국 기독교가 여기까지 왔는지 참담하기 그지없다. 공적 광장으로 보냄 받은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서 우리가 지나온 삶 저편의 낡은 창고에 저장해 놓은 기억들을 회상해 내는 일은 내면의 작업일 뿐 아니라 공적인 작업이기에 때로는 우리의 존재의 기반을 흔들기도 한다. 교회의가 다양한 층위들의 기억을 회상하고 고백하게 만드는 거대서사가 성경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에 근거하여 우리의 이야기가 다시 기억되고 회상되는 과정을 통해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이야기들을 창조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을 걸어가게 만든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일제 식민통치와 6.25라는 암울했던 과거를 신앙이라는 이름과 교리적 명분 그리고 거짓된 애국이라는 형태로 교묘하게 덮어버리려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깊이 반성해야 할 자리에 와 있다. 한국사회가 해방 후 일제 식민지 잔재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분단과 전쟁을 겪고 식민사관에 사로잡혀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단절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가 일제 식민시대에 신사참배라는 악연의 고리들을 끊어낼 뿐 아니라 6.25 전쟁이라는 비극과 분단의 아픔을 불식하지 못하고 사적인 신앙과 왜곡된 역사관으로 오늘날 우리의 사회문화를 바라보고 있기에 우리의 이지러지고 수치스러운 자화상을 대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반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기억과 회상이라는 통로를 통해 고백으로 나아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신앙이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6월에 이 땅과 이 민족을 하나가 되는 화해의 자리로 이끄시고 회복하시기 위해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화해의 사신으로 부르셔서 깨어지고 분열된 세상으로 보내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 반영되기를 기도하자.

최형근 /서울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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