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주필칼럼 ]

변창배 목사
2019년 06월 14일(금) 10:00
호국보훈의 달 6월에 선열들의 희생을 생각한다. 민족의 근대사는 거듭되는 전쟁과 식민지와 분단으로 얼룩져 있다. 고난과 극복의 시대라 할 수 있고, 5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우리나라가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룬 이면에는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컸다.

125년 전의 한반도는 뜨거웠다. 1894년이 시작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음력 1월인 2월 15일에 전라북도 고부에서 농민들이 무장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군을 보냈다. 5월 11일에 황토현에서 전주감영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6월 1일에 전주성으로 입성했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사태가 다급해지자 원병을 청하여, 6월 6일에 청나라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왔다. 6월 8일에 일본군도 텐진조약을 핑계 삼아서 제물포에 상륙했다. 6월 11일에 청과 일본군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었으나 두 나라 군대는 돌아가지 않았다.

도리어 6월 22일에 일본으로부터 추가 병력이 조선에 도착했다. 7월 23일에는 일본군이 한양에 진입해서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구성했다. 무력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의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 7월 25일에 아산 근해에서 일본과 청나라 함대가 교전을 시작하고, 7월 28일에는 아산 외곽에서 두 나라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양국은 8월 1일에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9월 15일에 평양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루 만에 청나라 군대는 2천 명의 사망자와 4천 명의 부상자를 남기고 평양성을 버리고 의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불과 500여 명의 사상자만을 기록했다. 일본군은 9월 17일 압록강 하구의 황해해전, 10월 24일 압록강 전투, 10월 25일 단둥 점령, 11월 21일 여순항 점령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여순항을 점령할 때는 2만 여 명의 시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반도에서는 10월부터 전세가 바뀌어서 농민군이 패하기 시작했다. 11월의 우금치 전투에서 1만 여 명의 농민군이 괴멸하고 불과 500여 명만 살아남았다. 일본군은 이듬해 2월 12일에 웨이하이 요새를 점령하고 3월 5일에 북경이 바라보이는 잉커우 외곽에서 진지를 구축했다. 3월 26일에는 대만을 점령했다. 일본은 사실상 동중국해를 지배하게 되었다. 드디어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했다. 그 때부터 한민족은 80년 동안 여덟 번의 국제전쟁에 휩싸였다. 청일전쟁(1894~95), 러일전쟁(1904~05), 의병전쟁(1905~12), 만주사변(1931~32), 중일전쟁(1937~45), 태평양전쟁(1941~45), 6.25전쟁(1950~53) 그리고 월남전(1964~73) 등이다. 전쟁의 승자는 동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에서 패권을 차지하고, 패자는 패권을 잃었다. 6.25전쟁에 한반도에 떨어진 폭탄의 양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든 국가가 사용한 폭탄보다 많았다.

우리 민족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던 그 시절에 영생의 복음이 들어왔다. 한국교회는 고난을 겪는 민족의 동반자가 되었다. 어둠의 터널을 더듬던 한민족에게 복음은 영생의 빛이며, 곧 생명의 빛이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남과 북이 평화적인 교류협력을 시작했으나, 125년 전 그 때처럼 주변 열강의 압력이 드세지고 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하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는 어느 시인의 글에서 희망을 본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우리 민족을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간절하게 기도드린다.



변창배 목사/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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