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나라사랑의 신앙유산

[ 특집 ]

송훈 박사
2019년 06월 14일(금) 00:00
조선 말기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왔을 때부터 교회는 그 신앙과 민족을 동일시 여길 만큼 민족에 대한 사랑, 나라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키워나갔고,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개신교회는 하나의 '민족교회'로 변모하여갔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민족 독립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많은 개신교 젊은이들이 민족주의 계열 학교에 진학하여 나라의 회복과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일제의 잔인한 폭력과 압제 속에서도 민족의 독립을 꿈꾸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독교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고자 했던 선배 신앙인들의 다짐은 1922년에 남궁억이 지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양 가사 속에 올올히 솟아 있다.

광복 이후 개신교도들은 한반도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소련군이 진주하며 공산주의 정권이 출범한 북한에서도 한경직과 윤하영 등이 기독교사회민주당(후에 사회민주당으로 개명)을 만들어 공산당에 대항하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며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사회개조를 위한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탄압과 공산당의 폭력적인 대응으로 인해 당 조직이 와해되고 이어지는 공산당의 정치탄압은 많은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한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된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전개했다. 김성수와 송진우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한민당의 총무 8명 중 5명이 저명한 기독교인이었으며, 1945년 9월에 정동교회에서 창립된 사회민주당의 주요 인물들 또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렇듯 수많은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은 정치, 사회 일선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광복된 한반도에서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자 최선을 다하여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의 신앙을 실천하고자 했다. 교회들이 전면에 나서며 정부를 세우고자 노력했던 한 측면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의 형태와 새로운 국가의 이념을 가지고 교회가 분열되고 대립했던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남한의 주류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해 그 나라와 그 이념이 반 기독교적이라고 적대하며 새로운 나라의 이념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나라 세우기 운동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의 애국 운동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미소 냉전의 시작과 함께 남한과 북한이 남과 북에서 각각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결국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역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참혹한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한창일 무렵 개신교회 목회자들은 전국을 순례하며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기독교인들이 분연히 일어날 것을 독려하고, 전장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기를 북돋는 일에 힘을 쏟았다. 분단 이전에 나라사랑이 민족의 부흥을 목표로 부강한 근대국가의 설립을 추구하였다면, 전쟁 이후의 남한 사회의 나라 사랑은 남한이라는 국가에 한정되어 적(북한)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고, 기독교적 복음으로 선진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에서의 안전을 추구하는 믿음으로 강화되었다. 특히 전쟁의 폭풍우가 지나간 상처뿐인 땅에서 신음하는 이웃을 보살피고, 나라를 재건하는 일은 기독교인의 사명으로 여겨졌다. 한국 기독교 신앙의 본이라고 여겨지는 한경직은 예수를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이 나라를 사랑하게 된다는 나라 사랑을 기독교 신앙의 한 축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북한을 적으로 보고,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모든 면에서 북한을 초월하는 멸공에서 승공으로 나라 사랑의 신앙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는 1960년대 남북의 경제상황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어서 중공업 중심의 북한 경제는 빠르게 경제를 재건해나갔던 반면 남한은 하루하루의 생필품이 모자랄 정도로 경제가 열악하였고, 전쟁의 기억들은 남한 사회 전반에 북한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만들 정도로 끔찍했던 시대적 아픔에 기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사랑을 하나님의 나라 선교의 연장으로 보았던 개신교 그룹들도 있었다. 이들은 정치, 사회적 이슈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화, 인권 운동에 앞장서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것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참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약성경의 '오클로스(ochlos),' 즉 '대중'들에 대한 성서적 해석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문화적으로 소외받는 자들을 '민중'으로 규정하여 이들의 인권을 회복하고 삶의 질을 제고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공의와 그 나라를 위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고백한다.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김재준, 문익환, 함석헌, 윤보선 등의 목회자들과 기독인들은 시민사회와 함께 주도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이러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인들은 나아가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한반도의 통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정점으로 하여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더불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통일운동에 한 박자 늦게 뛰어들었던 복음주의권 주류 교회들도 이 선언 이후를 기점으로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민간 차원의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특히 1990년 초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목도하면서 정치, 사회적인 접근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북한의 주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 인도주의적 지원과 북한을 위한 기도가 하나의 사랑의 밀알이 되어 북한 주민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한반도의 민족을 살리는 평화와 통일로 인도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6.25 전쟁 69주년을 맞이하며 새로운 평화 체제의 씨앗이 움돋는 이 한반도에서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신앙선배들이 삶으로 보여주었던 독립, 호국, 민주, 평화, 통일을 축으로 하는 나라 사랑의 기독교 신앙을 다시 세우고 이를 다음 세대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소망한다. 이 다섯 축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교회의 소중한 나라사랑의 신앙이자 유산이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만이 나라 사랑의 신앙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평화를 누리고, 화해하고, 분단된 이 땅을 민족이 번영하는 땅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들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나라 사랑의 신앙임을 고찰해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송훈 박사/숭실대학교 기독교통일지도자훈련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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