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애국은 나그네 돕는 것"

[ 특집 ] 사회통합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2.성경에서 말하는 '나라사랑'

김근주 교수
2019년 06월 03일(월) 11:17
어린 시절,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묻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으라'는 취지로 존 F. 케네디가 했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런 말을 그토록 많이 했던 시대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 시대였고, 그것도 모자라 장기집권을 획책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국가'를 강조하고 전체를 강조하는 주장을 들을 때마다 이제는 저 주장이 말하는 '국가' 혹은 '전체'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며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일지 의심하게 된다. 이제껏 정권이 나라 사랑을 강조하며 북한이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킬 때는 여지없이 국내 정치에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는 내부의 참상을 덮기 위한 최고의 재료이곤 했다. 사실은, 개인 혹은 국민보고 나라 위해 희생하라 할 것이 아니라 나라야말로 그 안에 속한 한 개인의 인권과 존엄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성경은 나라와 국가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의 흐름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그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다. 그 이래 아브라함과 그 가족의 정체성은 나그네이다.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유업으로 얻게 될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라고 이르신다(레 25:23). 땅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경작과 이용의 대상으로 규정한 희년법(레위기 25장)은 그 땅의 소유자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자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에게 땅이 주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언제나 '나그네'로 살아가게 하신다.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 율법의 근저에는 '애굽에서 종이었던 백성을 건지신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있으며(출 20:2; 신 5:15), 달리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다는 말로도 표현된다(레 19:34; 신 10:19).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 백성을 가리켜 '거류민과 나그네' 같다 이른다(벧전 2:11).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결코 이 땅에 있는 어떤 나라 백성이 아니되, 오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 땅에서는 철저히 '나그네'로 살아갈 따름이다.

한때 이스라엘이 나라를 이루고 세습 왕국 시대를 이루기도 했지만,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브라함 이래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규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나그네, 떠돌이이다. 이스라엘이 종이었기에 그들은 종을 쉬게 하여야 했고, 그들이 나그네였기에 그들 영역 안에 들어온 나그네를 환대해야 한다(레 19:33~34; 신 5:14~15; 10:19). 아브라함과 롯은 자신의 장막에 찾아온 나그네를 환대하였고(창 18:1~8; 19:1~3), 소돔 사람은 그런 나그네를 유린하려고 했다(19:4~9). 아브라함과 소돔의 차이는 전적으로 자신들 영역 안에 있는 낯선 사람,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했는가에 있다. 예수님에 따르면, 나그네와 같은 힘겹고 연약한 이웃을 어떻게 섬겼는가는 궁극적으로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는 기준이다(마 25:31~46). 종이었던 세월과 나그네로서의 삶은 이스라엘을 힘겹고 고통스럽게만 한 것이 아니라, 종인 사람들과 나그네인 사람을 이해하고 영접하며 섬기게 했다. 단일 민족을 강조하고 '우리나라'를 강조하는 경향이 이 땅에 살 길을 찾아 온 난민을 배척하고 '우리끼리'를 내세우게 만드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나그네'가 중심이 된 신구약 성경은 참으로 특별하며 의미 깊다.

'나라와 민족'은 근본적으로 배타적이다. 대개의 경우 '나라에 대한 사랑'은 다른 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맞물리곤 한다. '사사롭다'는 것은 그저 개인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사사로움'은 이익이 특정한 집단 안에만 머무르는 것을 가리킨다. 내 가족에게는 유익하되 다른 이웃에게는 피해가 되는 행동은 사사로운 것이며, 우리 지역에는 유리하되 다른 지역에 피해가 되는 행동은 사사롭다. 나아가, 우리네 교회에는 유익이되 다른 종교에는 피해가 된다면 이 역시 사사로운 행동일 따름이며, 우리나라에는 유익하되 다른 나라에는 피해가 되는 일 역시 사사로움일 따름이다. 크기가 '공적 영역'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의 범위가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유익이 되는 일을 했다 하여 기념하고 기리는 것은 사사로움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속한 나라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지 않는다. 바울이 당대의 교회를 두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라라는 막연한 대상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 대표되는 가난한 자, 곤고한 자, 슬픔에 빠진 자, 고통 당하는 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다'는 것의 실질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6월은 호국영령의 달이다. 6월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 운동을 했던 이들을 기리고, 6.25 전쟁 시절 참전하여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이들을 기념한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불의한 국가 권력에 맞서고 희생당한 이들을 기린다. 이와 같은 사건은 단지 나와 내가 속한 집단, 내가 속한 나라의 이익만을 위해 싸웠던 사건이 아니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착취하는 것에 대한 반대이며, 총칼로 자신들만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사건이다.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유익이 아니라, 억압과 착취, 폭력에 대한 반대,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수호이다. 일제 강점기를 기억할 때마다, 우리가 상기할 것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폭력과 정복, 침략에 대한 견고한 반대이다. 6.25 전쟁과 그 때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 모든 시도를 강력하게 반대하며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고 간직하게 된다.

약자와 가난한 자, 고통 당하는 자를 위한 정의와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가치야말로 우리가 6월에 지키고 보호하며 기념할 가치이다. 복음은 '민족주의'를 넘어선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말해지는 '나라 사랑'은 사사로운 이익 추구의 다른 말이 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 사랑'은 한국 기독교인과 일본 기독교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서로 다투며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고 망령되이 일컫는 추태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정의와 자유,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가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이들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는 무슨 가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곰곰이 돌아보게 된다.



김근주 교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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