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욕망, 성(gender)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탐구

[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 사라 코클리 주제강연 발제 요약 ]

사라 코클리
2019년 05월 27일(월) 15:28
기도, 욕망, 성(gender)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탐구



기도, 욕망, 성이라는 세 주제가 성서와 교부시대 증언 속에서는 비록 소홀하게 여겨지긴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맥락으로 실제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세 주제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처음에 영적인(spiritual) 지위를 어떻게 얻게 되는지에 관해 상당히 많은 관점을 알려주며 게다가 이 세 주제들 사이의 연관성을 재발견함으로써 자극을 받아 오늘의 세계에서 복음과 그 신학적 도덕적 사명에 대한 아주 의미 있는 새로운 통찰들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 기도의 독특성과 그 의미에 관한 문제에 오늘의 시각으로 새롭게, 그리고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접근한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아바(abba))'에게 향하도록 하신 말씀의 더 심오한 의미를 탐구하면(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가 다른 무엇보다 더 우선적으로 이루어지이다: 마 6:9~10), 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갈망(욕망(desire))이 지닌 매우 신적인 뿌리들을 탐구하고 또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에서 최우선으로 우리 자신을 그러한 신적인 갈망으로 넘겨야 하는 필요성을 포함하는 보다 더 깊고 심오한 것이다.

바울이 아주 심오하게 표현하듯이, 기도하며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갈망에게 우리 자신을 넘겨야 한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안에서 바라시는(desiring) 하나님-대-하나님 사이에서 이미 행해지는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롬 8:17, 29). 기도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여기에 이미 삼위일체론의 뿌리들이 놓여 있음을 주목하라.

로마서 8장에 있는 기독교적 기도에 관한 바울의 위대한 서론은 피조물 전체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것을 '간절한 갈망(eager longing)'으로 기다린다(고대한다)'고 말한다(19절, '진지한 기대감(he apokaradokia)'). 바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를 (기도에서 무엇을 가장 욕망, 바라야 하는지를)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바로 성령의 황홀함으로 우리를 인도하여야 하고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 자신과 고난의 영광을 통해 성부에게로 나아가야만 한다(26절).

성(gender)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을 소개하겠다. 세속적 성(gender) 이론은 성(gender)에 관하여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부지중에 자주 복제되는 문화적 추정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변혁시킬 수 있는지에 관하여 주장하고 고뇌하는 반면에, 기도와 금욕적 실천을 토대로 한 관상신학(a contemplative theology)은 제일 먼저 창조, 타락, 구속의 신학적 개념들을 원하는 대로 사용한다.

성(gender)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종말론적 소망을 지닌다. 즉, 경건한 허구 또는 소원-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의 사건들에 확고하게 근거하는 소망을 지닌다. 오늘날 세속적 성(gender) 이론이 전문용어로 '수행성'과 '제의성'이라고 명명하는 것에 상응하는 신학적 대응은 기독교의 기도적 관상이라는 독자적인(sui generis) '수행들'이다. 이 수행들은 '인간을 초월하는 독특한-힘'에 대한 '복종'의 행위이고, 또한 그 자체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특별하고 독특한 의미 안에 이미 발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발생(gendering)을 세상적 성(gender)과 '구별되게'하는 것은 삼위일체적 신적 욕망의 논리와 흐름에 의해, 기도 안에서의 성령의 일차적 개입에 의해, 그리고 일종의 관상적 '무지(unknowing)'에 대한 종속에 의해 변화되기 쉽다는 점이다. 성(gender)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성(gender)이 중요하기를 바라시고(desires)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형상 안에서, 신비스럽게, 성(gender)을 재형성 하시기에 여전히 중요하다.

사람이 의제 정하기를 중단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도록 여지를 만들면서, 기도의 인간적 불가능성 의미가 더 강렬해지기 때문에(참조. 롬 8:26), 그리고 그러한 불가능성의 의미가 기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선 활동하심의 필수성을 이해하도록 인간을 몰아가기 때문에 그러하다. 엄밀히 말해서, 자율적으로 기도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내 안에서 기도하시고 '성부여(Father)'하는 영원한 부름에 응답하시며, 다양한 고통의 단계를 거쳐 나를 새롭게 확장된 '자녀됨'의 삶으로 이끌어 가신다.

이 영적인 관계(기도, 욕망, 생물학적 성(sex), 사회적ㆍ문화적 성(gender))가 충분히 설명되면 현대의 삼위일체적 욕망존재론(ontology of desire), 즉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인간들 욕망의 근원이요 목표라고 보는 입장을 위한 충분한 자원들을 제공한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인간들의 한층 더 연약하고 종종 그릇된 욕망들을 일깨우고 훈계하고 정화시키며, 때때로 고통스런 성장의 여러 단계를 통해 어떻게 성자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하시는 지 알려준다. 나의 목표는 성령이 신적 욕망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강렬한 접촉점이며 입구이라는 점을, 또한 성령이 비뚤어진 인간마음을 깨뜨리기 위한 대체할 수 없는 양식의 초청이라는 점을 다양한 시각들과 관점들을 통하여 보여주는 데 있다.



사라 코클리 교수(케임브리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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