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 연재 '널다리골'

[ 여전도회 ]

한국기독공보
2019년 05월 02일(목) 16:51
나. 교회 안의 경제

전통적으로 아내들이 집안 살림을 꾸려왔듯이 한국교회의 연합활동과 선교사역에 있어서 여전도회의 실제적 공헌, 그 중에서도 경제적 역할은 자못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1930년 제3회 여전도회 총회에서 여전도회 연합대회는 중국 산동에 여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존에 장로교 총회의 선교비를 보조해 오던 방식을 수정하여 직접 선교지에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1931년 여전도연합회 총회에서 결의하여 김순호 전도사를 초빙, 산동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여전도회가 630원의 선교사 봉급을 단독으로 감당하면서 중국에 여성 선교사를 파송한 사실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후 거의 해마다 여전도회는 한 사람씩 여선교사를 파송하고 어학비와 사택비를 지원하면서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확대했다. 일찍이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적 참여를 실천하였던 한국교회의 여성리더십은 점차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구체적으로 확장하여 갔다.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한 여전도회의 경제적 지원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1936년 9월 교단 25회 총회는 전국교회가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 주일'로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3) 신앙과 교육·문화: 평신도 교육을 위한 여전도사 교육

1930년대는 성령의 역사로 평신도들의 전도열이 상당히 높은 시기였다. 당시 지역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를 도와 심방하면서 성경 연구를 할 수 있는 여전도사가 필요하다는 요청이 있었다. 이러한 요구가 많아지면서 평양의 여자 신학원과 원산 마르다 신학원 등 지방마다 성경학교가 세워지면서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Ⅲ. 1950~1970년대: "연합과 재건의 시대"

1. 신앙과 정치

(1) 6·25 전쟁과 세계 교회여성과의 연대 (1950년대)

6·25 전쟁 발발은 구미 각국의 여러 교회들과 한국 교회간 자매의식과 연대를 더욱 긴밀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미국에서 열린 70개 교파 3000여 회원이 참석하는 여성대회에 김필례 회장은 한국교회와 여전도회 연합회의 눈부신 발전상을 세계에 알리려는 부푼 꿈을 안고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전쟁으로 김 회장의 방미 여행은 그 성격이 완전히 변하였다. 약 1년간 계속된 순회강연은 해외에 한국전쟁의 실상을 알리고 각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각국의 여성 지도자들과 신앙 및 선교사명을 나누고, 이를 통해 세계 여성들과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전 후 여전도회는 더욱 활발하게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강화하여 나갔다. 세계 각국 교회 대표들이 한국을 더욱 빈번히 방문하였으며, 동시에 한국 교회여성들도 다양한 세계 대회에 참석하면서 세계 교회 안의 여전도회로서의 위상을 세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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