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독립운동을 자랑 아닌 반성의 계기 삼아야

[ 특집 ] '상해임시정부 100주년, 그 의의와 우리의 과제'(4월 특집) 4.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교회의 태도와 역할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9년 04월 22일(월) 11:12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건물. /사진 독립기념관
올해 임시정부 수립이 100주년을 맞이했다. 우리는 반만년으로 표현되는 유구한 역사 속에 처음으로 우리 스스로 주인이 되는 나라를 건설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높고 낮음이 없다는 성서의 가르침이 100년 전 우리 민족사에서 실현되었음을 감격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기독교의 신앙과 민주주의의 관계성을 논한 셈이다. 물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실현됐다는 것"과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이루어냈다"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주장에 대한 문제이다.

올해 대한민국 정부는 4월 11일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이는 우리 사회가 임시정부 수립의 기준을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임시헌장'의 채택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기독교인들 그리고 교회사 연구자들이 임시정부에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임시헌장'과 기독교 사상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 역시 '임시헌장'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시의성을 갖고 한국교회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찾아내고 알리는 것은 소중한 작업이다. 그러나 가끔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이루어낸 역사적 대변혁이 기독교의 작품이라는 지나친 의미부여가 일어나고는 한다.

민족사에 기여한 기독교의 역할을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이웃 종교의 기여, 또는 민중의 주체성을 폄하하는 것 사이의 놓인 벽은 너무나 낮아서 자칫하다 넘어가는 일이 생기기에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다. 3.1운동 100주년을 즈음하여 3.1운동은 기독교의 운동이었다거나, 3.1운동은 다 기독교가 한 일이라고 말하는 목사님들을 보면서 불편했었던 것은 그 안에 녹아 있는 이웃에 대한 무례함 때문이다. 3.1운동은 신분과 사상, 종교를 뛰어넘은 한국인의 운동이기에 특정 종교의 것이 아닌 우리 민족 전체의 것이어야 하며 나아가 보편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자리하여야 한다. 이는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임시정부를 놓고 벌어지는 일도 비슷하다. 보통 이는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연관성을 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특히 민주주의와 기독교 정신을 일치시키면서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이유로 임시정부를 '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임시헌장이 '기독교적'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임시헌장은 보편적 인권개념과 주권재민 의식을 담은 법률문서이지 기독교 신앙고백문서가 아니다. 임시헌장에 '신'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하여 이를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과 연결하는 것은 비기독교인에게는 모욕적인 주장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제4조에서 신교, 다시 말해 '인민의 자유'의 첫째로 종교의 자유를 말하며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의 헌법에 특정 종교의 신이 등장한다는 것은 헌법의 작성자들 스스로 헌법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말이며 동시에 임시헌장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역사와 종교전통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증거라도 나오지 않는 한 임시헌장에 등장하는 '신'은 지고의 도덕률이나 보편적 이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인권개념과 주권재민 의식은 어느 날 갑자기 외부에서 기독교에 의해 주입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민중들의 오랜 역사 속에서 잉태되고 자라온 것이다. 못 믿겠다면 '만적의 난'을 상기하자.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노비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물론 한국의 근대화와 서구식 민주주의 도입에 기독교의 기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한국교회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자격이 있다. 그러나 1919년 주권재민의 국가를 건설한 것의 토대가 기독교이며 임시정부와 임시헌장은 기독교적 성격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무례하다.

이런 일은 3.1운동에서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다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하나였으며 기독교 없이는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도래하지 못했을 것이라 주장하고 싶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개인은 그런 주장에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다. 기독교가 보편적 인권과 민주적 가치의 유일한 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거의 찬란함을 과시한다고 하여 현재의 비루함이 감추어지거나 정당화될 수는 없다. 지금 한국교회는 수많은 비판에 몰려있다. 그리고 그 비판 중 하나는 좀 겸손해 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답이 역사의 과대포장이라 한다면 더 큰 비웃음과 비판을 마주하게 될 뿐이다.

한국교회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헌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식으로 말하자면 역사를 어떻게 소비해야 효용을 극대화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역사는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 가장 유용해 지는 법이다. 작년 말부터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된 다양한 기독교의 성명서들이 3.1운동 당시의 교회와 현재의 교회를 비교하며 한국교회의 대대적인 갱신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던 것 역시 그런 이유이다.

3.1정신인 자주독립, 정의와 인도, 평등과 평화, 주권재민, 비폭력 등의 가치를 오늘에 되살리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임시정부와 임시헌장은 3.1운동의 결과물이며 사상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새로운 3.1운동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임시정부의 100주년은 한국 헌정 100주년이기도 하다는 측면에서 교회를 향한 추가적인 요청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헌법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헌법의 수호이다. 교회가 정치 또는 경제권력이 국민의 기본권과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언자가 되는 한편 인간의 인간성이 마멸되지 않도록 사회의 도덕률이 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기대를 수행하는 것은 언제나 유효하다. 나아가 교회 스스로 권력이 되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손승호 박사

명지대 객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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