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인가, 복음인가?

[ 주간논단 ]

조택현 목사
2019년 04월 02일(화) 11:21
'율법'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이나 복음이나 공히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 둘이 다른 단어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흔히 율법은 법적인 개념을, 복음은 은혜의 개념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는 율법은 구약성경을, 복음은 신약성경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율법은 신약시대 예수님의 복음으로 성취되고, 복음은 구약시대 율법으로부터 연유한다. 그러니까 율법과 복음은 본질상 하나님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기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때문에 율법은 배타적으로 비쳐졌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율법을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선교적 도구가 아니라, 외려 정죄하고 판단하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예수님은 특히 율법을 연구하고 다루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대립하셨다. 그들의 잘못된 율법 이해를 비판하면서 이른바 6가지 반제(Antithese)를 통하여 율법을 재해석하셨다. 살인에 대하여(마 5:21~26), 간음에 대하여(마 5:27~30), 이혼에 대하여(마 5:31~32), 맹세에 대하여(마 5:33~37), 보복에 대하여(마 5:38~42), 원수에 대하여(마 5:43~48). 이로써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완성하셨다.

율법을 복음적으로 보면 복음이 되지만, 율법적으로 보면 바울이 말하는 대로 '율법조문'일 뿐이다.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 아니던가? 율법을 잘못 이해하면 그 알맹이인 하나님의 뜻은 빠트리고 그 껍데기인 율법조문만을 붙잡게 된다. 알맹이인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하는 율법 읽기는 생명을 살린다. 껍데기인 율법조문을 중심으로 하는 율법 읽기는 생명을 죽인다. 율법의 부정적 기능이 마침내 생명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게 바울의 이해였다.

율법의 역기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만들어진 유대인의 '전통'(개역한글판에는 '장로들의 유전')은 율법의 의미를 더욱 손상시켰다.(마 15:2, 3, 6, 막 7:3, 5, 8, 9, 13, 갈 1:14) 정결법은 조상 대대로 내려와서 전통으로 고착된 것이다. 그것이 신앙적 유익을 주어야 할진대 그만 종교적인 정죄 수단으로 악용되고 만다.

복음은 율법을 포괄하고 넉넉히 담아낸다. 예수님은 그 점을 율법의 재해석에서 보여 주셨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생명 사랑이다. 예컨대 예수님의 안식일 해석은 이에 근거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유대인의 안식일 전통이 삶을 힘들게 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었기에.

율법이나 복음이나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일 율법을 율법적으로 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것은 비극이다. 율법을 복음적으로 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것은 다행이다. 또한 복음을 율법적으로 본다면 어떠하겠는가? 그것은 비극 중의 비극이다. 복음을 복음적으로 본다면 어떠하겠는가? 그것은 다행 중의 다행이다.

말씀은 율법으로도 복음으로도 비쳐질 수 있다. 어차피 율법이나 복음이나 명백히 하나님 말씀임에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적용하는가 하는 게 중요하겠다. '율법'과 '율법적'이라는 말은 사뭇 그 의미가 다르다. 전자가 말씀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후자는 그 말씀에 대한 수용방식과 이해방식과 적용방식을 가리킨다. 말씀을 율법적인 방식이 아니라 복음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하나님 말씀을 보되 결코 율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겠다. 하나님 말씀을 복음적으로 보는 것, 그것은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이자 명령이다.

조택현 목사/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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