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에 매진한 김마리아 선생, '한국의 잔다르크'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김마라아와 정신의 독립운동가들'주제로 학술대회 개최

이경남 기자 knlee@pckworld.com
2019년 03월 18일(월) 07:34
13일 김마리아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김마리아 서거 75주기 추모식.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2번의 옥고를 치르면서 왜경이 가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조국의 독립을 1여 년 앞두고 눈을 감은 김마리아 선생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사)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회장:이미자)가 지난 13일 정신여고 김마리아회관 애니엘러스홀에서 '김마리아와 정신(貞信)의 독립운동가들'을 주제로 '3.1운동 100주년 및 김마리아 서거 75주기 기념학술대회'를 열고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나타난 진한 신앙의 발자취와 항일구국운동을 되짚어봤다.

같은 날 김마리아회관 소강당 애니엘러스홀에서 열린 학술대회.
기조강연을 한 박용옥 교수(전 성신여대 사학과)는 1962년 김마리아 선생이 '독립장'을 받은 것에 대해 당시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를 제시하며 "독립장 서훈의 근거가 된 공적조서에는 김마리아 선생이 애국부인회 활동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르면서 심한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보석을 인정해 가출옥 후 병원치료를 받던 중 상해로 망명해 국내외 대한인들에게 자존감과 독립의 희망을 준 공로가 평가된 서훈이었다"며 "이후 김마리아 선생이 행한 독립운동의 공적들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지금에라도 활동을 재조명해 '대한민국장'으로 올바른 서훈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김마리아 가족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연유,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 가족사,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김마리아의 활약, 구금 시 받은 끔찍한 고문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김마리아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항일여성운동단체 조직이 일제에 발각돼 3월 6일 정신여학교에서 체포된다. 이후 왜성대로 압송돼 왜경에게 심한 고문을 당해 첫 출옥 시 코와 귀에 고름이 고이는 메스토이병에 걸려 거의 폐인에 이르게 된다. 박 교수는 "당시 김마리아가 당한 여러 고문들은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유방과 음부에 가해진 성고문, 고춧가루물 붓기 고문, 막대기를 무릎사이에 끼워 짓밝는 고문을 당했으며, 일정 간격을 두고 작대기로 머리를 때리는 고문으로 머리 밑부분이 물렁물렁해지기도 했다"며 당시 김마리아가 받은 악랄한 고문들을 열거했다.

그러나 출옥 후 김마리아 선생은 더욱 일제에 반발하며, 여성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힘쓴다. 김마리아 선생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탄생시켜 기존의 애국부인회가 담당하던 군자금 전달 역할을 뛰어넘어 '남자와 평등하게 조국독립전쟁에까지 참여할 의지'를 표명한다. 그러나 1919년 11월 28일 조직 내 배반자의 밀고로 인해 또 다시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받게 된다. 이후 상해로 망명한 김마리아는 여러 갈래로 나뉜 국외 독립운동계를 통합하기 위해 모인 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서 상해임시정부가 존속되어 독립운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독립운동의 줄기를 하나로 모으는 데 힘을 실어 준다. 김마리아 선생의 독립운동은 미국에서도 이어진다. 김마리아 선생은 '참 자주독립은 실력 양성에 있다'는 신념으로 조국 광복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아픈 몸으로도 교포들이 초청하는 연설에 빠지지 않고 응했으며, 여성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를 조직, 흥사단 활동, 선교회에서 개최하는 다양한 국제대회에 한국인 대표로 참여한다.

1932년 귀국 후에도 기독교 항일여성운동은 이어졌다. 김마리아 선생은 일제의 간섭과 감시로인해 서울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원산의 윌슨여자신학교에서 성경강의, 교회 전도사업, 종교모임과 강론을 통해 역사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일제 말, 국내 지식인 대부분과 교계까지도 일제에 굴복해 친일 행위를 했으나, 김마리아 선생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해 민족지도자로서 지조를 지키다가 고문 후유증이 심해져 조국 광복 1년 여를 앞둔 1944년 3월 13일 눈을 감았다.

박용옥 교수는 "김마리아 선생이 희망한 독립론은 실력 양성, 여성대중들이 국민의 일분자로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 국제사회에 우리의 독립을 인식하게 하는 외교적 활동 지향이었다"며 민족의 영웅인 김마리아 선생을 역사의 중심에 세울 수 있도록 다각적인 사업을 꾸준히 수행할 것을 요청했다.

이어 강영심 연구원(이화사학연구소)이'김마리아의 독립운동과 민족의식'을 주제로 , 이명화 회장(한국도산학회)이 '한국 여성독립운동의 요람지, 정신여학교'를 주제로 발제했다. 김마리아 선생의 독립운동 전략과 정신의 특징에 대해 강영심 연구원은 "탁월한 지도력과 리더십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과 단체 확장으로 여성 독립운동의 저변을 확장시켰고, 어떤 외부의 탄압이나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은 불굴의 저항정신을 보여줬으며,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해 개인의 안위를 버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평생 헌신한 희생정신, 선각적인 여성의식에 기초해 여성에게 국권과 인권의식을 자각하게 한 선구적인 여성독립운동가"라고 평가했다. 이어 발제한 이명화 회장은 "3.1운동의 정점에서 여성운동을 이끌던 정신여학교 학생들은 조선학생화, YWCA, 근우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며 "신사참배가 강행되자 교육에서 물러날 것을 결의하는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지로 전통을 지켜나갔다"고 평가했다.

이어진 토론시간에는 이충호 교육관(전 주일한국대사관 교육관), 윤정란 선임연구원(서강대 종교연구소), 이방원 소장(한국사회복지사문화연구소)이 김마리아 선생의 활동에 대해 부연설명하고 발제자들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술대회 전 열린 개회식에서는 KBS다큐 '나의 독립 영웅' 김마리아 편을 상영하고, 이미자 회장(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의 개회사, 축사, 김정민 성악가가 '김마리아의 노래'를 독창했다.

김미라아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김마리아 서거 75주기 추모식은 정신여자고등학교 최성이 교장의 사회로 열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신성애 장로(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전 회장)의 기도, 이성희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연동교회 원로)의 '신앙과 애국'제하의 설교, 이충호 법인이사의 추모사, 축도 등의 순서로 마쳤다.


이경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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