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역사 속 '자랑스런 장로교인' 빛났다

여운형 전도사, 김규식 장로 비롯해 평양신학교 졸업자 상당수 독립투사로
당시 전국 12개 노회서 보낸 3.1운동의 현장 증언, 제8회 총회록에 수록돼

이수진 기자 sjlee@pckworld.com
2019년 03월 01일(금) 14:50
1919년 10월 4~9일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 회의록에는 3.1운동 관련한 피해상황들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지난 26일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에서 연구보고를 하고 있는 장신대 이치만 교수(좌)와 임희국 교수(우)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여운형은 평양신학교를 중퇴한 장로교회 전도사였고, 파리 강화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한 달여 간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간 김규식은 새문안교회 장로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밀사로 파견된 서병호 장로는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 하나인 서경조 목사의 아들이었고, 김병조, 양전백, 이승훈, 함태영, 길선주, 유여대 등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장로교회 목사, 교인으로 민족대표거나 독립투사였다.

1919년 3월 1일 첫 만세시위가 평양 장대현교회와 숭덕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장로교회와 장로교인들이 100년 전 3.1운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했는지 감춰져 있던 역사적 사실들을 발굴해내고 연구하는 총회의 작업들이 일단락 마무리됐다.

지난 26일 3.1운동100주년기념예배에 이어 열린 연구보고 시간에 장신대 이치만 교수는 '1440 인물 연구조사 발간'과 관련해 보고하면서, "당시 3월 1일 12시 태화관에서 모인 민족대표들은 실내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선언식을 끝냈으며, 탑골공원에서 경신학교 출신인 정재용 전도사가 만세를 외치기 시작한 것은 오후 2시 30분이었다. 반면 평양에서 민족대표 중 하나인 길선주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장대현교회와 숭덕학교에서는 오후 1시에 독립선언식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면서, "역사적으로 최초 만세를 부른 곳은 장대현교회와 숭덕학교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평양, 서울, 안주, 진남포, 원산, 선천, 의주 등 7군데였고, 서울과 감리교가 중심이었던 원산을 제외한 다섯 군데는 장로교 목사와 교인들이 중심이 된 만세시위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만세시위 적극가담자라고 볼 수 있는 형사피고인 및 수감자 중 장로교인은 1440명.

이치만 교수는 "3.1운동 탄압의 최일선에 있었던 조선헌병대사령부는 평안도 조사보고서에서 '소요와 야소교와의 관계가 매우 농밀하다'고 결론짓고 있다"고 소개하며, "당시 1.8%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시위주도 30%, 피체·투옥 20%를 차지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3.1운동에 참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440명은 조선총독부가 수집한 3,4월 두 달간의 조사기록 중 장로교인 수이며, 아직 발굴되지 못한 더 많은 장로교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총회가 추진한 연구로 1300여 명의 장로교인들이 이름을 찾게 됐다.

이 교수는 "당시 기독교는 서양종교이자 외래종교였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은 기독교의 활약을 똑똑히 지켜보았고, 기독교를 우리 민족 사회에의 마음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웃이 되고 동반자가 된 것"이라며, "지금의 우리가 편하게 예수를 믿고 전도할 수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사회문화적인 모멘텀을 만들어냈던 '그 분'들을 모두 기억하고 '그 이름'을 찾아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3.1운동 참여교회 전수조사 발간'에 대해 보고한 임희국 교수는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적 실체로 남아있지 않는다. 이번 전수조사는 역사의 실체를 파악하고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이었다"고 설명하고, "1919년 이전에 설립된 교회가 남한에 433개이고, 이 교회 중 전수조사를 통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진 교회가 102개 교회였고, 이들 교회 중 본교단 소속인 68개 교회에 '3.1운동 참여교회 기념동판'을 수여하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전수조사로 신한청년당 김규식 장로가 새문안교회에서 1910년 12월 18일 장로장립을 받은 기록과, 그의 처이자 김마리아의 고모인 김순애가 1921년 9월 27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김병조 목사가 시무하는 상해한인교회로 이명한 기록을 찾게 됐다.

임 교수는 "1919년에 열린 장로교회 총회 제8회 회록에는 '경성 서대문 감옥에서 수금된 전 총회장 김선두 씨와 … 증경 서기 함태영 씨와 … 길선주 씨에게 본 총회가 편지로 위문하기로 동의 가결하다'고 기록돼 있으며, 당시 총회로 올라온 전국 12개 노회의 보고에 의하면 어느 교회의 집기와 가구가 파손됐으며, 누가 징역을 살고 태형을 받고 체포구속 됐는지, 봄에 일어난 독립만세 참여로 인해 가을인데도 개학하지 못한 학교가 어딘지 교회와 학교, 교인들의 피해가 낱낱이 보고돼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회의록은 전국교회들이 1919년 당시 보고해 준 것이기에 3.1운동의 현장 증언"이라고 말한 임희국 교수는 "이 증언은 혹독한 고문, 징역 등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장로교회를 증언해주는 것"이라며, "제8회 총회회록에 있는 12개 노회 중 당시 북한노회의 형편이 고스란히 다 있다. 함남, 평남노회 등의 기록은 한반도 통일 이후 3.1운동 전수조사를 하는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5~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장로교회 1919년 3.1운동 전수조사 자료집'은 5월 중순경에, 1440 인물연구조사 자료집은 4월 중순경 출간될 예정이다.
이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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