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에 순응하는 '늙은 오빠'

[ 목양칼럼 ] 강건상 목사1

강건상 목사
2019년 03월 08일(금) 10:18
지난 설 명절 때 우리 교회 청년들과 편하게 이야기 하던 중,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 한국말이 서툰 한 여자 청년이 실수로 필자를 '오빠'라고 불렀다. 주변에선 다들 박장대소를 했고, 명실공히 지난 명절 필자가 들은 최고의 덕담으로 선정됐다. 부모 나이의 목사를 오빠로 불렀으니 말 실수한 청년이 느끼는 당혹감이야 말할 수 없이 컸겠지만, 필자는 왠지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싫지 않는 느낌이 다시금 착잡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거나, '목사님이 상당히 젊다' 등의 소리를 들어왔다. 보통은 동안(童顔)이라는 소리가 칭찬으로 들릴 수 있지만 목회를 하는 필자에게 꼭 반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연배가 있는 집사님과 어디를 방문하면 필자보다는 같이 간 집사님을 목사로 오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그래서 좀더 나이들어 보이는 방법이 없을까하는 고심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흰머리가 많이 보이는 쪽으로 가르마를 옮길까 하는 생각도 했고, 하얀 머리로 탈색을 해볼까도 고민했었다. 젊어 보이는 이유가 평소에 복장을 간편하게 입는 것도 있겠고, 언행이나 인격에서 어쩔 수 없이 풍겨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에겐 한동안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그런 시간이 지나가고 근자엔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로부터 "목회하느라 고생을 많이 해서 얼굴이 삭았네"와 같은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이전과는 정반대의 평가를 듣고 있다. 심지어 아들 녀석은 "아빠가 그렇게 늙어 보이고 싶어 하더니 이제 팍삭 늙어 보여요"하며 웃기도 했다.

이제는 도리어 '회춘'(回春)의 소망을 품어야 하는 부담감을 안게 된 것이다. 이 때를 맞이하니 세월의 바람이 뒤에서 앞으로 가라고 억지로 떠미는 것만 같아, 그 재촉의 야속함을 원망해 보기도 한다. 이럴 때면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반백(半百)의 나이에 반백(半白)이 되어 버린 머리를 염색이라도 해야 되나'고민하던 중에 그저 해프닝이라도 '늙은 오빠' 소리를 듣게 된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기로 했다.

젊어 보인다는 얘기를 듣던 때는 내면의 위엄이 없는 것을 괜스레 외모 탓으로 돌렸는데, 도리어 늙어 보인다는 평가를 듣게 되자 목회자로서 아직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왠지 모를 조급함에 마음이 갈지자로 흐느적거리게 된다. 하지만 이 마음을 억지로 잡아서 세월에 순응하기로 다짐해 본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든, 늙어 보이든 주님을 닮기 위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 뿐이니, 겉모습에 나타나는 변화만큼이나 속사람도 여물고 성숙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강건상 목사 / 세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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