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몸도 마음도 송두리째 조국에 바치다

정신학원, 동경 여자학원 유학 기록 발견…"나라와 민족 위해 헌신한 선배들 열정 이어갈 책임 막중"

이수진 기자 sjlee@pckworld.com
2019년 02월 15일(금) 11:38
김마리아가 1917년(대정 6년) 일본 동경의 여자학원 고등과를 진학한 자료.
정신학원(이사장:이군식) 이사회가 지난 2월 7일 동경 여자학원을 방문해 당시 자료와 관련해 설명을 듣고 있다. / 이희천 전 교장 제공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일본 도쿄 = 이수진 기자】 2.8독립선언을 국내로 밀송하고 3.1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쳤던 김마리아가 당시 일본 동경 '여자학원'에서 유학했던 기록이 최근 발견됐다. 대정 6년(1917년) 동경 '여자학원'의 본과 졸업자 명단과 고등과(현 동경여자대학교) 입학자 명단에 김마리아가 포함된 것이 확인됐다.

이번 일본에서의 김마리아 흔적 찾기는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그녀의 모교인 정신학원(이사장:이군식) 이사회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에 초청된 정신학원 방문단은 지난 7~9일 2박 3일 일정 가운데 직접 여자학원을 방문, 정신학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마리아와 김필례의 흔적을 찾았다.

이사장 이군식 목사(영광교회)는 "김마리아의 여자학원 유학은 동기들의 글에서 발견됐을 뿐, 학적 자료는 갖고 있지 않아 모교인 정신학원으로서는 의의가 크다"고 말하고, "이와 함께 김마리아의 막내고모이며 정신여학교가 신사참배로 폐교 후 다시 문을 여는데 앞장섰던 김필례의 자료도 찾을 수 있어 중요한 방문이 됐다"고 설명했다.

김마리아가 다녔던 동경에 위치한 '여자학원'은 1875년에 선교사가 세운 기독학교다. 지난 1975년 여자학원이 개교 100주년을 맞아 학교를 빛낸 인물을 꼽을 때 '김마리아'와 '김필례'가 선정되기도 했다.

최성이 정신여고 교장은 "그동안 김마리아가 일본에서 유학했던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은 여자학원의 고등과가 1920년에 동경여자대학으로 통합되고, 여자학원이 여러 차례 불이나 자료소실이 많았다는 것을 이번 방문을 통해 알게 됐다"며, "이번에 발견한 자료들을 통해 동문들이 타향에서 공부하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 수 있었으며, 타향에서도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믿음의 선배들의 열정을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더욱 무겁게 느꼈다"고 말했다.

정신학원 이사장 이군식 목사(우)와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이미자 회장(좌), 이송죽 부회장(중)이 김마리아와 이번 방문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김마리아는 고등과 졸업을 1년 앞두고 1919년 학교를 중도에 포기했다. 여자학원 본과를 졸업할 때의 성적은 19명 졸업생 중 2등이다. 여자학원에서 학업을 다 마치지 못했지만, 1920년 3월 김마리아에게 졸업증서를 우편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성도 실력을 갖춰야 한다. 실력이 국력이다"는 말을 평소 지론처럼 펼쳤던 김마리아. 그녀의 생각은 곧 그녀의 삶에도 이어졌다. 중국과 미국으로 쫓겨가 망명생활을 하는 중에서도 상해대학, 파크대학, 시카고대학, 뉴욕 비블리컬세미너리 등 그녀는 학업을 이어가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길렀고, 머무는 곳에서는 항일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기미년 만세 때에 큰 활약을 하여 일제의 악독한 체형을 받고 기형이 되었지만 끝끝내 굽히지 않고 애국운동을 하신 여성 애국자"(백범 김구)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 10명만 있었던들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다"(도산 안창호)

"그분 제가 잘 압니다. 한국 여성 애국자로 제일 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녀를 '내 누이동생이니 가석방 해주어야 하겠소!'하고 총독에게 직접 말한 기억이 나구 말구요!"(스코필드 선교사(한국명 석호필))

2.8독립선언, 3.1만세운동, 임시정부 수립 등 한국의 근현대사의 굵직한 역사의 현장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김마리아를 칭송하는 말들이다.

김필순, 서병호, 김순애, 김규식, 김필례 등 애국투사 삼촌들과 고모, 고모부 등 친인척 사이에서 자란 김마리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가 세워진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서 태어난 그녀의 집안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이 집안의 가계에는 독립유공자가 김마리아를 포함해 6명이나 된다.

"빼앗긴 인권을 찾고 빼앗긴 국권을 회복할 최대의 목적을 향해서 우리 부인들에게는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김마리아가 초안한 대한애국부인회의 취지문 중 일부다.

1919년 2.8독립선언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그녀는 당시 다니던 동경 '여자학원'을 중도에 그만두고 미농지에 복사한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기모노의 넓은 오비(허리띠) 속에 넣어 본국으로 은밀히 들여와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해 앞장 섰다. 그러다 일경에 피체돼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하다가 병보석으로 겨우 풀려나 상해로 탈출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가서도 유학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항일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해 활동했으며, 1933년 13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서는 어려움 속에서도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조국의 독립을 1년 앞둔 1944년 순국하기까지 그녀의 생은 나라를 위한 숭고한 애국 정신과 조선 여성들의 계몽을 위한 교육활동으로 점철됐다.

그녀는 조직원의 밀고로 대구감옥소에 수감된 상황에서도 함께 갇힌 애국부인회의 임원 50여 명들과 함께 밤낮으로 찬송을 불렀다. 특히 김마리아가 선창하여 부른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는 함께 수감된 동지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찬송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직 나라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두 차례 옥고를 치른 김마리아에게 남은 것은 악독한 고문의 후유증이었다. 인두로 지지는 고문으로 오른쪽 가슴을 잃었다.

김마리아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가슴을 잃었다. 생전에 입던 앞섶의 길이가 서로다른 저고리를 든 최성이 정신여고 교장(좌)와 이미자 기념사업회 회장(우).
지난 12일 정신여고를 찾았을 때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이미자 회장은 "함께 생활했던 수양딸 故 배학복 여사가 평소 김마리아의 저고리 앞섶이 기우는 것을 보고 의문을 가졌다고 했다. 김마리아가 어렵사리 고문의 흔적으로 인한 신체의 기형을 털어놨고, 그후 두 분이 한참을 붙들고 울었다고 들었다. 그 뒤로 배학복 여사는 어머니가 입을 저고리의 앞섶 길이를 달리해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생전에 김마리아가 입던 저고리는 수양딸이던 故 배학복 여사가 보관하고 있다가 기증해 현재는 정신여중고 동창생들이 주축이 된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에서 보관 중이다. 앞섶이 서로 다른 저고리 한 벌과 수저 한벌이 그녀가 남긴 유품의 전부다.

이송죽 부회장은 "중국, 미국 등 망명해 간 곳에서도 끊임없이 여성들을 규합해 조직하고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며, "3.1운동 주동자로 서대문형무소, 대구감옥소 등에서 받은 고문과 악형을 어떻게 견뎠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김마리아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때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네 명이 함께 받았다. 이 당시는 그녀가 중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자취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에서 펼친 항일운동을 가지고만 훈장을 받았기에, 기념사업회는 해외에서 독립활동한 자료를 추척해 수집했으며, 이를 토대로 훈격이 상승할 수 있도록 서명운동 중이다. 2월 현재 서명자가 2만명을 넘었다.
이수진 기자
2.8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해 일본을 방문한 정신학원 이사회. 동경한인학교 교장을 지낸 이충호 이사와 그의 일본인 친구의 도움으로 여자학원에서의 김마리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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