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과 혼돈 사이 부르심의 자리는?

[ 크리스찬영화보기 ] 2. 가버나움

김지혜 목사
2019년 02월 20일(수) 09:2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숱한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혼돈 가운데 침잠했던 곳이 가버나움이라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레바논의 베이루트 빈민가는 희망의 실오라기조차 보이지 않는 혼돈과 절망뿐이다.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가 현실(다큐멘터리)과 가상(극영화)의 경계를 허물며 진정성을 획득했다면, 그것은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다가 캐스팅된 아마추어 배우들 덕이 클 것이다. 그들은 생존의 위협에도 서류가 없어서 보호 받지 못하던 자신들의 삶을 영화로 녹여냈다. 그들의 연기는 사회가 비인간으로 규정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말하는" 하나의 저항이자 삶 그 자체였다.

영화의 주인공인 열두 살 소년 자인은 여동생 사하르를 임신중독과 하혈로 죽게 한 매부를 칼로 찌른 죄로 수감 중이다. 양손에 수갑을 찬 채 내뱉는 자인의 대사가 자극적이다.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자인의 고소는 자녀들을 무책임하게 낳기만 하는 부모를 향한 것이지만, 이를 방관하는 사회시스템이나 우리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녀들을 방치하고 학대하며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내몰 뿐 아니라 어린 딸을 팔아버리기까지 한 부모는 항변한다. "나처럼 살아보지 않았잖아요." 그러나 이 변명은 어떻게든 사하르와 요나스를 포기하지 않으려던 자인의 사랑과 존중,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 삶을 삶답게 살아가려는 생의 의지 앞에서 힘을 잃는다. '인간성(humanity)'이다. 자인의 부모와 사하르를 데려간 남성은 자신들의 욕망에만 충실할 뿐 아이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다. 인간성의 상실이다. 물론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전은 레바논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나딘 라바키 감독은 사랑 대신 욕망과 껍데기만 남은 종교에 일침을 가한다. 사하르를 잃고 슬퍼하기보다 새로운 아이를 얻은 것이 신의 선물이라는 어머니의 말은 값싼 위로의 전형이다. 신부와 신도들이 수용소로 찾아와 부르는 찬양에 감화될 수 없는 수감자들의 표정은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걸 원하지 않아요. 우리를 짓밟을 뿐이죠"라는 자인의 이야기와 맞물려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한다. 하나님이 오늘날 자행되는 참혹한 현실들을 그저 방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조차 그리스도를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비움과 자기-제한, 자기-수여를 통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처럼 말이다. 그분은 친히 고통 당하셨기 때문에 누구보다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아신다. 진정한 위로를 건네실 줄 아는 분이다. 그 위로는 철장 밖을 맴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 깊숙한 곳까지 어루만진다. '가버나움'의 어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위로의 마을'이다. 고단한 여정 끝에 자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던 것처럼, 기적과 혼돈 사이에서 가버나움이 위로의 마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제자로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바로 두 시간 남짓 스크린을 보는 관객의 감상에서 나아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실천을 시작하는 것 말이다.



김지혜 목사

문화선교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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