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독립 위해 '공공책임'의 지도력 발휘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7. 김마리아 <3> 여성들의 실력양성·연대에 평생을 힘쓰다

최상도 교수
2019년 02월 12일(화) 13:45
좌로부터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세 살 때 아버지를, 열네 살 때 어머니를 잃은 김마리아는 삼촌 김윤오와 김필순의 보살핌으로 고향 황해도 소래를 떠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마리아와 함께 했던 삼촌들과 고모들은 독립운동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큰 삼촌 김윤오는 세브란스병원 앞에 '김형제 상회'를 거점으로 1906년 10월 평안도, 황해도 인사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애국계몽단체 '서우학회'를 창립하여 이끌었고, 작은 삼촌 김필순은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로 헌신하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북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고모 김필례, 김순애와 고모부 김규식, 서병호 등도 역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이끌어간 지도자였다. 이런 집안의 배경은 마리아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국내와 중국, 미국 망명 중에 끊임없이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한 행보와 배움을 이어가게 했다.

그녀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시절, 국내 독립운동 시절, 망명시절, 그리고 귀국 후 활동 속에서 매번 여성모임을 조직 혹은 재편하여 발전시켜 나갔다. 국내외 대한의 여성들은 김마리아를 구심점으로 여성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녀는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장로교여전도회의 회장으로 이 모임들을 유지 발전시켰다.

일제 강점기, 항일여성단체의 회장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지도자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그것은 오랫동안 견디어야 하는 긴 고난과 고통의 여정이다. 이집트에서 백성을 이끌어낸 모세가 이집트 왕의 권력 앞에서 백성을 대신하여 목숨을 걸고 서야 함을 의미하고, 동시에 백성의 불만과 불신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희망으로 돌려놓아야 하는 이중고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예견된 민족의 핍박 앞에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왕 앞에 나아간 행동하는 지도력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김마리아는 일제 강점 하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모세와 같은 지도자임을 역설했다. 그녀가 추구한 모세의 리더십은 신을 의존하는 진취적 기상, 협동 정신과 언행일치, 이기심을 버리고 긍정적인 공익적 목표 추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녀는 일부는 그런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일부는 그 지도자를 따르고 협력하므로 지도자를 성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단합하기를 공부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고, 한때 친구이며 동지였던 오현주는 김마리아를 '솔선수범',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경'하며 '언제나 말이 없는 가운데 행동'하는 모습으로 기억했다.

실로 김마리아는 일제 식민지 하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그 자신이 개인적 출세와 권력 추구와는 거리를 두고 오직 여성들의 실력양성과 협력, 연대를 통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공공 책임'과 '체제 저항'의 지도력을 실현해 나갔다. 이러한 김마리아의 리더십은 곧 그녀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마리아가 직접 작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문, 파크대학에서 조국에 있는 언니들에게 보낸 편지글, 근화회 조직 취지문, 귀국 후 '종교시보'에 게재한 '조선기독교여성운동'등을 통해 볼 때, 그녀는 그리스도인의 보편가치인 타자를 위한 자기희생적 사랑, 인류의 자유와 남녀평등, 그리고 여성교육을 위한 선각자적인 사상을 피력하고 실천해 나간 것이 분명하다.

김마리아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남은 과제는 우선으로 김마리아의 저작들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김마리아가 직접 쓴 그녀의 글들 또는 그 영향 하에 기록된 글들의 집대성은 김마리아의 행적 뿐 아니라 그녀의 사상적 발전과 변화를 밝히는데 주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동경여자유학생학우회 회장 때 학우회지로 출판한 '여자계' 창간호는 당시 김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점은 매우 안타깝다. 또한 김마리아와 직접 교제하였던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남은 과제로 보인다. 특히 김마리아 귀국 시 중요한 역할을 한 캐나다 선교부와의 관계를 좀 더 명확히 자료를 통해 밝히는 것이 김마리아의 귀국 과정과 귀국 후 활동을 더 섬세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자료의 발굴을 통해 김마리의 연구는 영향사, 사상사 등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가 진척될 것으로 보인다.

최상도 교수 / 호남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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