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11월 3일

2018년 10월 26일(금) 17:57
월-역사하는 믿음
본문: 막 7:24~30
찬송가: 542장

오성민 목사/금촌교회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다. 그리고 이 믿음, 소망, 사랑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있어야 할 것을 또한 말씀하신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을 보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말씀하신다. 믿음이 있되 역사가 나타날 정도의 믿음이어야 하고, 사랑이 있되 땀 흘려 수고할 정도의 사랑이어야 하며, 소망이 있되 고난과 긴 기다림을 견뎌낼 정도의 소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한 이방여인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을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적극적인 믿음이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라고 말씀한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5장 22절에 보면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했다. 이방 여인이 유대인 제자들의 틈을 지나 예수님에게 간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하는 믿음은 이와 같이 적극적인 믿음에서 일어난다. 우리에게는 적극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는 능력이 없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 분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역사를 일으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두번째는 난관을 극복하는 겸손한 믿음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곧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7장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 여인의 부르짖음 앞에 주님은 침묵하셨다. 뿐만 아니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이 여인을 개로 비유하여 거절하신다. 그렇다. 때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침묵하신다. 이 주님의 침묵이 우리를 무척 당황스럽게 한다.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자존심을 꺾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역사하는 믿음이다. 이에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예수님 상아래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주어 먹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개의 신분으로 낮추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권을 인정하고, 거기서 오는 부스러기를 원했다. 이에 겸손한 신앙으로 다가오는 여인의 청을 결국 예수님은 들어주셨고 집에 돌아가 보니 귀신이 물러가게 되는 축복을 얻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딸을 구할 수 있었던 역사하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실 것을 믿는 적극적인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요, 나아가 예수님의 거절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겸손한 신앙으로 예수님을 붙들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어떤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겸손한 신앙으로 예수님을 붙들어 역사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화-생명수의 강
본문: 계 22:1~5
찬송가: 419장

손경란 목사/어부동교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 하나님의 백성, 교회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요한은 본문의 묘사를 통해서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명은 바로 생명수의 강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성도들의 생명의 근원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구약의 어디에선가 본적이 있을 것이다. 에덴동산, 그리고 또 한 곳 있다. 에스겔서 47장 1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 새로운 성전에서 물이 흐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회복된 에덴과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 온 새 성전이 성도 안에 구현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타락함으로 원래 차단되었던 것을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부어주시는 생명력을 성경은 '복(바라크)'이라고 한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그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복'을 받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생명수의 강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이미 이 땅에서 그 '복'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답은 '예수'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하는 샘물은 예수님 자신이다. 그런데 그 여인이 달라고 하는 샘물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우물에서 나온 기적 같은 세상의 물이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수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예수님에게 자기 육신의 목을 축일 기적 같은 물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그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생명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까 이 여인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달려간다. 이것이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흐르는 성도의 모습이다.
 
생명은 오직 예수 안에만 있다. 그래서 그 안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성도들은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힘의 원리에 의해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이 세상은 완전히 잘못된 세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러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오시자마자 세상 힘의 상징인 헤롯 왕의 정체가 잔인하게 폭로되는 것이다. 아울러 생명수의 강을 소유한 자들의 삶은 이 억지뿐인 세상 속에서 이성을 간직한 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 십자가 너머에 우리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오늘의 기도
생명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달마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자들로 축복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만나주시는 하나님
본문: 창 33:12
찬송가: 428장

연광희 목사/산성교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다. 무질서를 질서로 바꿀 수 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자 형 에서의 분노가 바뀌어 온정으로 변했으며, 야곱을 죽이려는 사병은 야곱을 호위하는 군사가 됐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고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인생에 참 만족이 없음을 진실되게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유한한 인간으로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해야 한다.
 
야고보서 4장 14절은 우리 인생을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로 비유했다. 잠언 27장 1절도 내일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인생은 물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듯 인생은 유한한 존재인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유한성과 불완전성, 죄성을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둘째로, 고백이 있은 다음에는 눈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바라봐야 한다. 죄 짓고 불의하며 추악한 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당당히 바라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위하여 못박혀 피 흘리신 예수님을 쳐다봐야 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여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늘 믿고 의지해야 한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으면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모든 죄짐을 주 앞에 내어 맡겨야 한다. 주의 보혈을 통해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고 날 위해 보혈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과 만남의 사건이 일어난다. 이 결정적인 만남이 일어나면 우리 마음 속에서 그 증거로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 마음 속에 부활의 새 생명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기쁨이 솟아난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게 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살다가 영원한 세상으로 가는 나그네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부활의 새 생명이 들어와 하나님의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목-가장 좋은 선물
본문: 약 1:14
찬송가: 294장

이정식 목사/경인제일교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은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어 놓아도 인간이 만든 것은 반드시 좋은 것만큼 나쁜 것도 생긴다. 어떻게 하면 그림자가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은 가장 좋은 은사와 선물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변화가 많고 복잡하고 악이 많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은 왜 '악'을 주셔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시나 원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선물은 선하다는 것이다. 선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으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연단하실 뿐이다. 그러나 연단도 우리가 감당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시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는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하신 것같이 우리도 선하게 만들기 위해 연단을 하실 뿐이다.
 
둘째,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다. 은혜로 주셨다는 것은 값을 받지 않고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받았다. 가족, 재산, 사업장,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심지어 고난과 시련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왜 선물인 줄 아는가? 그 고난과 시련이 머지않아 은혜가 되고 복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는 어둠이 없다. 그리고 그림자도 없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내게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게 된다.
 
셋째,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되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온전한 것을 주시되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다.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끝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 그런데 사탄과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은 결코 너 같은 죄인을 사랑할 수 없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죄인이야. 어떻게 하나님이 너 같이 죄 많은 사람을 사랑하실 수가 있겠어?" 이런 마음을 집어넣어서 우리를 미혹케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은혜의 선물을 온 세상에 나누는 그리스도인, 복된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집에 있는 교회
본문: 몬 1:1~7
찬송가: 559장

강성효 목사/장수교회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초대교회 중에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는 대표적인 대형의 대중교회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교회가 나타나기 전 이미 많은 성도들의 가정에서 예배가 드려졌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교회(행 12:12), 빌립보 자주장사 루디아의 집 교회(행 16:40), 에베소의 아굴라 부부의 집 교회(고전 16:19), 라오디게아 눔바의 집 교회(골 4:15) 등이다. 본문 2절에 기록된 '네 집에 있는 교회'도 당시 가정교회 중 하나인 '빌레몬의 집 교회'를 말한다.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의 구성원들을 보면 "빌레몬과 압비아와 아킵보, 그리고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한다"는 것으로 보아 가장인 빌레몬 자신과 그 아내 압비아, 아들 아킵보, 그 외에 이웃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 가정의 가족을 중심으로 가까운 이웃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가정이 교회가 되고 가정교회가 차츰 성장하여 큰 교회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교회 역사도 신약의 초대교회와 같은 양상이다.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 이끌어간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원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 성령의 역사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성도들을 움직여간 힘의 원천은 예배가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즉 교회의 설립과 성장과 부흥의 역사는 성도들이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가 힘의 원동력이었다.
 
근자에 우리나라 교회가 서양교회처럼 사양의 길에 접어들었다고들 말한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장 원천적이고도 중요한 원인은 가정예배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산업화가 시작되며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갔고 반면 탈 농촌 현상으로 우리의 가정들은 대가족 제도에서 소가족 제도로, 이제는 핵가족, 1인 가정 시대가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의 사고는 집단 중심에서 개인 중심의 이기적인 사고로 변화되었고 사고의 변화와 함께 전통적으로 중요시되었던 가치관도 와해되었다. 사회의 변화는 곧 교회의 변화로 이어졌다. 농촌의 와해는 농촌교회를 위축시켰고 농촌교회의 위축은 도시교회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대안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족이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가정에서부터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다. 가정예배를 회복하면 가족 구성원들의 신앙이 회복된다. 가정이 건강한 신앙공동체, 가정교회가 된다. 가정교회가 회복되면 마을교회가 회복되고 마을교회가 회복되면 온 나라도 회복된다. 우리민족의 소망은 오직 가정을 하나님의 교회로 만드는 것에 있으니 그 시작은 가정예배의 회복에서부터다.
 
오늘의 기도
가정예배를 통하여 개인과 가정이 변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가정이 되고 교회가 되고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내가 부를 새 노래
본문: 시 40:1~5
찬송가: 338장

노경천 목사/제주성지교회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캘커타 병원을 운영하고 있을 때, 하루는 돕고 있던 수녀가 테레사 수녀에게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았다. "오늘 우리 병원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터졌는지 아세요? 곳곳에 문제 투성이입니다." 그때 테레사 수녀가 하는 말이 "자매여, 문제를 선물이라고 다르게 부를 수 없겠는가? 이 문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면 문제도 선물이다. 이 문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면 또한 잘 해결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문제라 부르지 말고 선물이라고 부르자."
 
우리의 삶 속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지만 크고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윗은 고난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고난을 극복해 나간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이것이 비결이다.
 
수동적인 기다림은 '시간이 가면 어떻게 되겠지'라며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능동적인 기다림은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나의 상황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것처럼 막막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간섭하셔서 어떻게 역사하실지를 기다리는 소망이다. 이 능동적 기다림은 고통과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수고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귀한 시간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때때로 우리는 내가 아는 것, 내가 보는 것,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에 나의 삶을 맡기고 나의 문제를 맡겼을 때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비밀이 내 삶속에 펼쳐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은 지금 새 노래를 부른다. "새 노래, 곧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새 노래를 부른다. 고난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며 더욱 놀랍게 펼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며 새 노래를 부르게 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리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이 은혜의 새 노래를 부르는 우리 모두가 되자.
 
오늘의 기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바라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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