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13일

[ 가정예배 ]

2018년 10월 05일(금) 17:47
월-고난의 유익
본문: 삼상 1:4~11
찬송가: 542장

이 땅에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군이라고 하는 다윗의 가정을 보자. 아들이 반역을 한다. 탈선을 한다. 그리고 그 형벌로 죽음을 맞는다. 모든 가정은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사무엘 가정은 어떤가? 그 가정에도 문제가 많았다. 무엇이 한나로 하여금 불행한 여자에서 행복한 여자로 바뀌게 한 걸까?
 
첫째, '부족함'이라는 고난이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아이를 낳지 못함과 브닌나의 괴롭히는 언행이 한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만약 하나님이 한나가 결혼하자마자 쉽게 임신하도록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브닌나가 한나를 격분하게 하지 않고 위로하며 잘 대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나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사무엘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나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둘째,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한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한나가 이런 표현을 했을까? 한나는 17년이란 긴 세월을 힘들고 서럽게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함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을 선물로 받게 된다. 서럽고 힘든 시간이 흐른 후 소중한 결과를 얻게 된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결과는 준비된 축복이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가슴 아플 때가 분명히 있다. 속 쓰리고 쓸쓸하고 외롭다고 느껴질 때 있다. 힘들고 버거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 힘들었던 시간들을 다 지내고 보면 그 때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간증할 때가 올 것이다.
 
셋째, 고난은 우리가 가장 성숙해지는 순간이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피눈물 나는 아픔의 과정이 따른다고 한다. 가장 아픈 순간에 몸부림치면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한나는 브닌나가 격동케 하고 번민케 하는 순간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다. 브닌나에게 대항해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했다.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을 토로하지 말자. 그때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 하소연해야 할 때이다. 이것이 바로 한나의 삶의 방식이었다. 가장 큰 아픔을 통해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면서 가장 성숙해지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고난을 통해서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한나처럼 항상 기도하며 주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정식 목사/경인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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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정과 예배
본문: 창 4:25~26
찬송가: 42장

여기저기서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원수가 되고 죄 없는 아이들이 이리저리 내몰린다. 많은 남녀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하고 홀로 살겠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살겠다고 아우성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자체와 정부가 이런 일들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한 이 나라 현실을 보며 과연 그 종착점이 어디일까 암담하다. 미래를 예측하는 학자들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창조질서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정은 개인의 안식처이자 가족 공동체의 삶의 근원이며 꿈의 보금자리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실 때 그 구성원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남자와 한 여자다. 한 남자와 한 여자로 가정을 만드신 이유는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아서 돕는 배필로, 짝을 주셨다.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혼자 사는 것은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지 못하다. 또 혼자 일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합력함으로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가.
 
다음은 가정의 사명 공동체성을 회복케 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천부적 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길이자 은혜와 복을 누리는 길이다. 천성적으로 성품과 기능이 다른 남녀가 짝이 되어 만들어 가는 가정과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운가? 가정을 구성하는 이런 모든 원리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끝으로 가정을 예배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다. 예배는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과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형제 아벨을 죽이고 죄와 사망의 길로 갔다. 성경은 아벨 대신 태어난 셋과 그 후손들이 하나님과 함께 엮어내는 이야기책이다. 가인의 길과 셋의 길이 갈라진 분수령이 오늘 본문이다. 가인의 후손들은 가는 곳 마다 다툼과 살인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셋의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본문은 공동체적 예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셋의 후손들이 만들어낸 최종 결과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받은 것이다. 예배는 가정에 주어진 최대 최고의 축복이며 사람의 본분이다.
 
오늘의 기도
축복의 수단으로 만들어 주신 가정이 이기주의로 인하여 무너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정욕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사 창조 때의 원리를 회복하게 하시고, 예배공동체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성효 목사/장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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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물댄 동산, 마르지 않는 샘
본문: 사 58:9~12
찬송가: 295장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덕담은 "물댄 동산처럼, 마르지 않는 샘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십시오"라고 한다. 이 축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본문에서 여섯 가지로 알려 주고 있다.
 
첫째, 어둠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축복이다. "너희의 빛이 새벽같이 비친다"(8), "너희의 빛이 흑암중에 떠올라 너희의 어둠이 낮과 같이 된다"(10)고 했다. 때로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면 나를 통해 그 어둠을 이길 수 있는 빛이 증거된다는 것이다.

둘째, 빠른 치유의 축복이다. "너희의 치유가 급속하다"고 했다. 모든 질병과 상처, 아픔이 급속하게 치유되고 치료된다는 것이다.

셋째,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다."여호와의 영광이 너의 뒤에서 호위하신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이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밀어 주시고 내 앞에서 나를 인도하는 축복이다.

넷째, 확실한 기도응답의 축복이다."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를짖을 때에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했다. 내가 하나님을 애타게 찾고 부를 때에 나의 음성에 귀기울이시고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것이다.

다섯째, 영혼이 건강하고 만족하는 축복이다.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라고 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축복이다.

여섯째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축복이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다"라고 했다. 회복의 역사 축복의 역사가 이어져 감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물의 근원에 가까이 가야 한다. 물댄 동산이 되기 위해서는 물의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물이 공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되고 만다.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 공급되어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가까이 간다. 계속 함께 있고 싶어진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 그리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우리 안에 부어져 물댄동산 마르지 않는 샘의 축복을 받게 된다.
 
둘째,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나를 통해 흘러가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물댄동산 삼으시는 이유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은혜의 강물이 넘쳐 흘러 살아나는 은혜가 있기를 위함이다. 나를 통해 내 가정이, 내 자녀가, 내 교회가 내가 사는 이 땅이 살아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자.
 
오늘의 기도
오늘도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경천 목사/제주성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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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인생의 중심
본문: 갈 2:20
찬송가: 546장

오래 전에 히말라야를 등반하다 죽은 등산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사진에서 특이한 것은 얼어 죽은 등반대원이 신발을 가슴에 꼭 안고 죽은 것이었다. 높은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은 언제나 잠을 잘 때 젖은 등산화를 몸에 품고 잔다. 왜냐하면 얼어붙은 등산화를 자기 몸으로 녹여 다음날 따뜻한 신을 신고 산을 오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등반대원의 잠은 온통 내일의 산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등반대원에게는 다른 것이 자리 잡지 않는다. 오직 산, 등반이 삶의 전부인 것이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무엇을 가슴에 품고 사는가? 내일의 꿈을 위해 아름다운 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가? 혹시 정작 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품고 사는 것은 아닌가?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을 찾고 성경을 논하지만 삶의 자리에서는 그것을 품지 못하고 겉만 맴도는 것은 아닌가?
 
이제 주님은 우리의 삶이 바꿔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인생의 중심을 바꾸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가슴 속에 내일에도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을 품으라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의 신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의 중심은 그리스도였다. 그의 가슴에 품었던 것도 그리스도였다. 다음날 일어나서 어제와 같이 일할 수 있는 내용도 그리스도였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그리고 내일의 삶에도 언제나 그리스도였다. 그가 표현한 대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전부였다. 자신 속에 있는 자신은 주인이 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바울은 떳떳하게 내 안에 사는 것,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는 삶이다. 우리 안에 중심이 된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우리 안에 품은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여, 등반대원들처럼 내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야한다.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꿈 속에서라도 그리스도를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삶 전체가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 복음전파가 우리의 꿈이 되어야 한다. 이 결실의 계절에 우리의 삶에 이런 결실의 모습이 있기를 소망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가득 채우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대로 사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성민 목사/금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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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하나님의 형상
본문: 창 1:26~27
찬송가: 425장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궁금해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과 삶에 관한 것이다. 수많은 철학가, 작가, 예술가가 '인간은 무엇인가?'에 글과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인간과 인생에 대한 바른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말한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다. '형상'이라는 단어는 '자르다, 베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됐다. '모양'이라는 단어는 '~과 비슷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즉, 자르고 베고 깎아서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특정한 유사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심히 좋아하셨다. 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이 처음에는 순결했다. 죄가 들어온 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이제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자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땅을 보존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다시 하시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어떤 부분이 계속 존재하며 또 어떤 부분이 부패되거나 상실된 것인가?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뢰하고, 순종하도록 주어진 재능과 능력을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데 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능력과 은사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어 있던 의와 거룩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들은 첫째로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 돈, 명예, 자녀, 쾌락 등을 우상으로 삼는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의 변질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관계를 통해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하는데,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셋째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땅을 착취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그런데 어떤 한 무리의 백성들에게 그 왜곡되고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듭난 후부터 계속해서 그 사랑의 삶을 배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 사랑의 열매가 계속 맺히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의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손경란 목사/어부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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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리가 드릴 영적예배
본문: 창 22:1~14
찬송가: 314장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 예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사를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죽이는 의무 정도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예배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 공식적인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십자가 사건이 체험되고 나누어지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바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를 통해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시험하셨다.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요, 이스라엘의 미래요, 수많은 민족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삭을 죽이라고 하신다.이때 아브라함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 것은 약속의 말씀이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는 부활의 신앙을 끄집어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오직 말씀을 붙드는 신앙이다.
 
둘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 했다. 지체하지 않고 번제로 드릴 모든 것을 준비해 모리아 산으로 향한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달려 죽을 십자가를 등에 지고 언덕을 오르신 것처럼, 이삭도 자기를 태워 죽일 나무를 등에 지고 올라가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기 아들을 죽이고 죄인들을 초청하는 복음의 진지한 부르심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 온 힘, 뜻, 열정을 쏟아붓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셋째,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에 준비해 놓은 숫양으로 번제를 드렸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든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저지했고,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숫양을 제물로 바치게 하셨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대속제물이라 한다. 어떤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다른 것이 대신 죽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대신 죽여서 그 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제사요,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시키신 그 희생과 사랑이 오늘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재연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다.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 하나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을 믿고 그 산으로 힘껏 올라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비밀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시키신 그 희생과 사랑이 오늘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재연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연광희 목사/산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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