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앞선 생각…'마을교육공동체'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 열전 1. 남강 이승훈 <3>이상적 마을 공동체를 꿈꾸다

강영택 교수
2018년 09월 18일(화) 16:37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위치한 남강 이승훈 선생 동상.
남강은 다채로운 인물이다. 젊을 때는 유능한 상인으로서 역량을 발휘했고, 이후 도산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이끌기도 하였고, 나아가 3·1운동을 주도하는 민족지도자로서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민족기업육성운동, 언론과 출판활동을 통한 민족계몽운동, 교육구국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평양자기회사와 태극서관을 설립·운영하였고,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하고 오산학교를 설립·경영하기도 하였다. 남강은 이처럼 다양한 이력을 지녔지만 그가 가장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오산학교요, 교육운동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육공동체운동이었다. 남강은 오산지역에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마을교육공동체 건설을 꿈꾸었다. 그는 학교를 중심으로 한 건강한 마을공동체를 우리나라 전역에 만드는 일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면에서 남강은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마을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100년 앞서 이 일들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실천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강을 생각하고 탐구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주요 화두로 등장한 마을 만들기, 마을교육공동체, 마을목회 등의 뿌리를 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남강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교육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바는 공동체 운동이었다. 남강은 학교가 단순히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교육공동체가 되어 학생들의 인격과 삶을 새롭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인격과 삶을 바꾸는 교육이 학교 학생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에게도 이루어져서 마을 전체가 새로운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을교육공동체 계획은 1910년대까지는 학교가 위치한 용동마을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다 3·1운동 주도로 투옥되어 감옥에서 신앙과 생각이 더욱 깊어진 후 그의 공동체 구상은 확장되었다.

그는 이제 용동마을을 넘어 오산지역의 일곱 마을까지 포함하여 이상적 공동체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오산에 보통학교와 중학교 건물을 새롭게 짓고 운동장도 넓히고 실습농장도 마련하였다. 그리고 교원들의 사택, 공동 목욕탕, 학교병원을 지어 학교마을, 사택마을, 병원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이 세 마을과 용동을 포함하여 좀 떨어진 네 마을까지를 합하여 오산의 일곱 마을을 새로운 이상적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학생들은 오산의 여러 마을의 주민들 집에 기숙하였고, 학교병원과 목욕탕은 마을 주민들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학교에서 개최되는 강연회와 음악회나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사경회에도 마을의 주민들이 같이 참석하여 한 가족과 같이 듣고 즐기고 배우기도 하였다. 남강은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오산을 하나의 큰 가정과 같은 공동체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남강은 자치적인 마을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오산의 일곱 마을에 각기 동회를 조직하게 하고 그 전체를 묶어서 협동조합을 설치했다. 협동조합은 원래 학생과 주민들에게 학용품과 생필품을 값싸게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고, 사무실을 오산학교 구내에 두었다. 조합원은 오산의 주민들과 오산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대표가 조합회의에 참석했다. 그래서 협동조합의 회의는 오산의 여러 마을 동회의 연합회의의 성격을 띠었다. 협동조합의 회의에서는 학교와 마을, 교회의 일까지도 논의되었다. 대개 주민들의 생활에 대한 문제들이 다루어졌지만 이뿐 아니라 지역사회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도 논의되었다. 공동생산, 산업에 대한 계획, 공동노동의 필요성, 교육계몽강연 등의 문제들과 정치적 문제까지도 토의가 이루어졌다.

남강은 덴마크의 그룬트비의 영향을 받아 오산 일대에 유치원에서 보통학교, 고보를 거쳐 대학에 이르는 모든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싶어 했다. 그는 여성교육을 위한 여학교와 농과대학 설립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였지만 총독부가 설립인가를 내주지 않아 계획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강은 꿈을 버리지 않고 오산 일대에 연습림과 임해농장을 만들고, 학교재단이 직접 경영하는 직조공장과 제사공장을 설치할 계획도 추진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교회, 병원, 공회당과 도서관을 사이에 두는 깨끗한 마을이 있고 마을 외곽지역에는 공장과 농장을 두는 이상적 마을공동체를 구상한 것이다.

남강은 교육과 신앙과 산업이 서로 연결되어 완전한 자치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 공동체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 공동체에 대한 꿈은 그의 이른 죽음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이상적 공동체를 꿈꾸는 많은 이들이 남강으로부터 열정과 영감을 이어받아 그 일을 실천하고 있다.

강영택 교수 / 우석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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