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교육 통해 '민족의 살길' 꿈꾸다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 열전 1. 남강 이승훈<1> 민족지도자 남강의 일생

강영택 교수
2018년 09월 04일(화) 10:40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남강 이승훈.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신앙을 품고 민족을 사랑한 기독교교육사상가들의 삶을 돌아보는 기획을 시작합니다. 외세 침략에 나라가 흔들리고 주권을 피탈 당했던 시절, 인재를 키우는 교육운동을 통해 독립에 앞장섰던 기독교교육사상가들의 족적과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봅니다. 교육학자, 역사신학자 등 전문 필진들이 참여해 한 인물 당 3회씩 소개할 예정입니다.


<1> 민족지도자 남강의 일생

오늘날 대한민국은 교육에서 길을 잃었다. 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한지 이미 오래다. 진리의 빛을 가졌다는 한국교회도 어둠 속에서 헤매기는 마찬가지다. 배금주의와 경쟁지상주의의 이 세대를 본받은 결과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사회가 혼란스럽고 길을 찾지 못할 때 진리의 길을 제시하며 실천했던 예언자적 인물들이 있었다. 오늘날 고통과 죽음의 교육에서 벗어나 생명과 희망의 교육을 찾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한 역사적 인물이 있다. 그는 어두웠던 일제강점기 하에서 올곧게 신앙과 교육을 통해 민족의 살길을 꿈꾸었던 남강 이승훈선생이다.

남강 이승훈(1864~1930)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민족 지도자이다. 남강의 생애는 1907년을 기점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진다. 전반기의 생애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사업가로서 성공을 일궈내어 자기 개인과 문중의 중흥을 꾀했던 삶이었다. 반면 후반기의 생애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교육 및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과 민족기업 육성운동에 헌신했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삶이었다. 1907년은 그의 생애에서 극적 전환을 가져왔던 시기로 도산 안창호와의 만남과 오산학교의 설립이 있었던 해였다.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남강은 어릴 적 부모를 잃고 11살의 어린 나이에 임박천이라는 사람의 상점에서 사환 일을 하며 자라게 되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하여 마침내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사업에 큰 타격을 입고 개인과 민족의 운명이 함께 함을 자각하게 된다. 그 후 정주의 오산으로 내려와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자기 일가 되는 여주 이씨네를 모아서 한 문중을 만들었다. 그곳에 서숙을 설치하고 문중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학교와 공장을 가진 새로운 모범 향촌을 만들 계획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도산의 연설을 들은 남강은 신교육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하고 오산 지역에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본격적인 교육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도산과의 만남으로 남강은 독립운동의 중심축 역할을 한 신민회 활동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신민회 활동의 산업부문인 자기 회사와 태극관의 관리자가 되어 일을 하였다. 이후 남강은 3.1만세 운동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동아일보의 사장을 역임하면서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강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했던 일은 오산학교를 통한 교육운동이었다. 1907년 도산의 연설을 듣고 교육운동에 뛰어든 이후 1930년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오산학교는 그의 삶에서 중심에 있었다.

1907년 개교한 오산학교는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민족지도자들을 길러내는 도량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남강은 오산학교를 통해 민족운동에 이바지할 인재를 키우고자 했고, 특히 백성을 교육시키는 선생을 양성하고자 했다. 남강은 개교식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중략) 총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긴요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중략) 내가 오늘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들을 가르쳐 만분의 일이나마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오산백년사 편찬위원회, 2007).

오산학교에는 남강을 비롯하여 여준, 서진순, 박기준 등이 초기 교사로서 헌신했고, 이후 이광수, 유영모, 조만식, 신채호, 홍명희 등 우리민족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교사와 교장으로 와서 교육을 담당했다. 물론 그들을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초빙하는 데는 남강의 역할이 컸다. 그 결과 오산에서 공부한 졸업생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시인 김억과 김소월, 화가 이중섭, 목회자 주기철과 한경직, 의사 백인제, 사회운동가 함석헌 등이 오산이 배출한 졸업생들이다. 특히 많은 졸업생들은 남강이 바라던 대로 전국의 학교에 가서 후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오산학교는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의 대성학교와 함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였고, '사관학교와 훈련원과 정치학교와 인문중학교와 특수모험자 양성소를 한 데 겸한 학교'와 같았다고 한다.

오산학교는 남강이 두 차례나 투옥되어 학교를 오랫동안 비우게 되고, 일제에 의해 학교건물이 전소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강의 헌신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후원으로 학교는 어려움 중에서도 외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30년 남강은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하루 전에도 학교에 와서 아침 조례에서 학생들에게 훈화를 하였고, 죽기직전 마지막 유언에서 자신의 유해를 묻지 말고 생물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남강의 인생은 철저하게 민족과 함께 한 생이었고 온전한 교육자로서의 삶을 보여주었다.

강영택 교수 / 우석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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