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골교회를 찾던 은혜의 시간들이 그리워

[ 4인4색 ]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8년 05월 29일(화) 09:00
1999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유학생활에서 배운 가장 값진 경험은 각 지역 곳곳을 다니며 이민교회들을 방문했던 일이다. 유학 중 조국을 떠나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교포들의 순수하기만 한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결심하게 된 일이 이민교회를 찾아다니며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심으로 시작한 이민교회 방문으로 나는 미국 50개주 전역의 구석구석을 다 다녀보는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미국시골교회에서의 집회는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분들은 나의 노래도, 내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분들이었다. 사실 그 분들 앞에서 찬양을 하는 것은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첫 찬양이 시작되자마자 100여 명의 여집사님들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집회는 눈물의 홍수 속에서 진행됐는데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특별함이 느껴졌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외로운 이민자의 삶을 살던 이들은 고국의 사역자가 고국의 언어로 부르는, 그것도 100킬로그램 훌쩍 넘는 사람이 부르는 찬양에 큰 위로를 받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미국 시골교회의 찬양집회를 경험하며 나는 스스로 마치 하나님의 위문 공연단이 된 느낌을 받았다. 맞다. 하나님 얘기로 웃고 울 수 있는 그 시간은 공연하는 나에게도 참 행복이었다.

20여 년 전 미국 뉴멕시코주의 작디 작은 시골교회를 방문한 기억이 난다. 비행기를 다섯시간 타고 봉고차 렌트를 해서 3시간 더달려 찾아가 교회 성도들 앞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23명의 성도들이 앉아있었던 그 집회에서 두시간 동안 간증과 육중한 이 '뚱땡이'의 춤에도 한번도 웃지않고 반응도 없이 오히려 집회 내내 무거운 숨을 내쉬던 어느 거구의 할아버지는 집회 내내 내 마음을 힘들게 했다. 그 할아버지는 제일 앞에 앉으셔서 자그마한 예배당 제일 앞자리에서 반응도 묵묵히 앉아만 계시던 뉴멕시코주의 그 할아버지는 집회가 끝나고 음반 사인회와 다과시간에 나에게 다가오셨다.

내 손을 굳게 잡아주면서 하신 말씀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미국 이민 와서 25년동안 이렇게 웃어본 적은 없었어."

'엥? 이분도 속으로는 좋으셨었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나의 손을 잡은 그 분의 손은 이미 굳어질대로 굳어진 커다란 굳은 살들이 느껴졌다. 그 커다란 손에 파묻힌 내손이 아플 정도로 그 할아버지는 나의 손을 꽉 쥐시며 수고했다고 등을 두들겨주셨다.

옆에 있던 등이 굽으신 한 여집사님은 우시면서 "저같이 미군 남편을 따라 전세게를 옮겨다니며 외로워하는 미굿 가족들이 많다"며 "오키나와, 프랑크푸르트 등 미군이 주둔하는 곳에는 한국 교포와 교인들이 있으니 찾아가달라"고 부탁하시기도 했다.

그래, 나는 하나님이 주신 노래로, 몸짓으로 위문공연하는 '하나님의 광대'라도 좋겠다. 사랑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셨지 우리에게 초대 받아 오시지는 않으셨다. 나는 지금도 그 마음으로 찾아가는 찬양 간증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집회를 다니던 초창기 나는 이렇게 기도했었다.

"내가 없다고 안될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내가 함께할 수 있어 그곳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함께 하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찬양하고 간증하고 싶은 마음의 시작이었다

미국 대통령도 다 찾아가 볼 수 없다던 미국의 오지까지 찾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찬양하게 해주신 은혜가 새삼 그립다.

[박종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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