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유, 피해자의 고통 분담

[ NGO칼럼 ]

채수지 소장
2018년 04월 17일(화) 14:25

교계 미투를 통해 들려오는 교회 지도자의 성폭력 문제는 사회의 미투운동과는 다른 정도의 큰 충격을 준다. 교계 미투는 교회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제사장인 줄 알았어요', '혼돈스러우면서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를 목사가 가르쳐주는 것 같았어요'라는 피해자의 고백은 교회와 신앙을 뿌리서부터 의심하게 한다.

이처럼 피해자들의 폭로는 금기를 깨는 일이고 교회에 대한 공통된 합의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들은 피해를 당한 후, 교회 밖에서 교회를 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안된 것 같다.

종교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의지처가 되어주고 박탈감과 좌절을 달래줌으로써 현실을 살아갈 힘을 주는, 일종의 심리적 보상작용을 한다. 사람들은 위기에 처했거나 심리적으로 취약해지거나 정체성 혼돈을 겪는 시기에 흔들림없는 강한 신앙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강하고 전능한 하나님 표상이 교회지도자를 통해 형성된다. 더욱이 신앙인들이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신앙은 교회 지도자에게 맹목적일만큼 순종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기독교여성상담소에 찾아온 피해자들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첫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피해를 입었다.

한마디로 교회 성폭력은 종교의 특징인 절대적인 믿음과 의존을 이용한 성범죄이다. 한 영혼에 대한 성적 착취이니만큼 죄질이 매우 나쁘다. '왜 믿었지?' '왜 따라갔지?'라는 식의 질문은 성사되지 않는다.

무죄한 피해자들에게 성폭력의 책임을 물어 그들을 죄책감과 혼란에 빠뜨리는 일은 예수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나 다름없다. 피해자들이 성폭력 피해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순수한 믿음이 배신당하고 피해자인데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교회가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를 믿을 수 없어서 하나님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안 믿어지지만 믿고 싶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미투운동은 그 절박한 마음들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피해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교회 밖에서 슬피 울고 있는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거라는 희망과 교회에도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들이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어려운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미투 이후가 쉽지는 않을거라 예상했지만, 가해자들과 그를 맹신하는 성도들의 공격으로 피해자들은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고통받고 있다. 가해자들 중에는 정말 악랄할 정도로 돈과 권력을 총동원해 혐의없음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가해자 편에 선 성도들은 가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무엇이든 불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아직까지 위드유 운동은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힘을 보태주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를 위한 집회, 언론보도, 금전적 지원 등 필요한 것은 많은데 나서는 이가 적다. 괜히 나섰다가 피곤한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피해자들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면 어쩌지요?', '교회로부터 해코지를 당하면요?', '저는 법적 싸움을 할 만한 돈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아직도 피해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고 자신이 혼자라고 느낀다.

미투, 위드유는 정의를 바로세운다는 명분 차원에서 머물면 안된다. 정의는 피해자 각 개인의 삶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피해자들은 "제 삶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걸 다 쏟아붓고 가까스로 회복된다해도 원점이지만요"라고 말하고 있다. 고통을 분담하지 않는 위드유는 허세에 불과한 것 같다.

우리 중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될 것인가?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가진 것을 내어주면서 피해자들의 편에 설수 있는가? 정의는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 가운데서 바로 세워질 것임을 믿으며 위드유 운동이 피해자에게 실질적 지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채수지 소장
기독교여성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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