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도시락 전달자'

[ 4인4색칼럼 ]

박종호 장로
2018년 03월 28일(수) 08:54

1985년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을 시작으로 예수전도단에서의 귀한 헌신자들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깊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와 선교사들을 위한 간절한 중보기도는 기존의 예배형식에만 익숙했던 내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나는 '자비량'이라는 '페이스 미션(faith mission)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고,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풀타임으로 헌신하였음에 월급은 0원이라는 특이한 사람들 또한 충격이었다. 자녀들을 가진 가족의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방 한두칸의 공동생활비 마저도 내어가며 위탁한 헌신자들과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통해 그분의 인도하심만 따르고자 하는 모습은 나에게 엄청난 도전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헌신자들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이 괜실히 부럽기만 했다.

이렇게 예수전도단과의 사역은 시작됐다. 이들과의 교제 속에서 어느덧 나의 찬양사역이 십수년 지나갔다. 찬양 사역은 때로는, 아니 날마다 수 백 번씩은 그만두고 싶었던 사역이었다. 

1999년 고별콘서트를 세종문화화관 대극장에서 열고, 뉴욕 Manns음악대학원에 진학해 졸업했다. 2002년 미주의 한 교회 찬양집회를 준비 중에 예수전도단 대표 목사님으로부터 안부를 듣다가 영국 모슬렘인들을 위해 선교하는 한 선배 선교사가 뇌종양임에도 불구하고 후원금이 없을 때 때로는 영국에서 쓰레기통도 마다않고 뒤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뼈 아프고 피끓는 거룩한 부담감에 그저 내가 드릴 수 있는, 아니 나의 모든 음반, 책의 수익을 다 드려서라도 뇌종양을 앓는 선교사가 쓰레기통을 뒤지지는 않게 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집회를 다니며 후원을 감당했다.

미국의 작디 작은 그것도 교민이 20명, 30명, 50명밖에 되지 않는 시골교회를 다니며 찬양집회를 열고 선교사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 수익 전체를 선교지에 드리다보니 1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서울의 아파트 4~5채 정도의 재정을 흘려보내게 하셨다. 물론 나는 전세 하나 장만도 못하면서 나름 사명을 불태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내 형제가 그 처절한 상황에 있는데 진정 피를 나눈 형제가 그토록 힘들다면 이 정도는 힘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개인 사역자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재정을 사용하며, 선교사들을 뒷바라지 하게 하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어와 문화마저 외로운 이민사회에서 외로이 막노동 등으로 때로는 처절하게 삶의 생존의 기로에 서서 신앙을 지켜가는 거룩하고 순수한 교포 교회 교인분들의 도움과 사랑 없이는 이어갈 수 없는 사역이었다.

단지 나는 노래했고, 그 노래와 헌신과 음반 수익 모두는 '오병이어'의 단초를 마련한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었을뿐임을 고백한다.

그저 나는 사랑을 퍼나르는 '행복한 도시락 전달자'였을 뿐이었다.

박종호 장로
CCM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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