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처한 문명적 위기 극복과제…대화 절실

[ 연재 ] 신학과 과학의 만남 - 과학 기술 성취, 유토피아 VS 디스토피아

이대성 교수
2018년 03월 27일(화) 16:08

역사적으로 볼 때 신학은 늘 당대의 학문적 사조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신학과 타 학문 간의 만남이 급증하고 있고, 그 양상도 달라지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오늘날 학문의 동향이 학제적이 되었다는 점과 많은 신학자들이 신학교가 아니고 종합대학에 속해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원인으로는 4차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최근 과학기술의 발전이 모든 학문 분야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4차산업혁명은 특히 신학과 과학의 대화가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지금까지 신학과 과학의 만남의 역사를 충실하게 요약ㆍ평가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테드 피터스가 엮은 '과학과 종교:새로운 공명'(1998년 발간, 2002년 번역)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 피터스는 과학과 종교의 만남의 역사를 과학 제국주의, 교회 권위주의, 과학적 창조론, 두 언어 이론 등으로 설명하면서 바람직한 만남의 모델로 '가설적 공명'과 '윤리적 중첩'을 제안한다. '가설적 공명' 모델은 과학과 종교의 일치와 조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공통 영역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통일보다는 평화적 공존을 이루려는 시도라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다. '가설적'이라는 용어는 과학과 종교가 경직된 태도에서 벋어나, 앞으로 새로운 이론이나 증거가 나오면 입장을 변경할 수도 있다는 유연성과 지적 겸손을 갖춰야 함을 표현한다.


'윤리적 중첩' 모델은 과학이나 종교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주제보다는 현재 인류가 처한 문명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실천적인 과제를 중심으로 두 영역이 대화해야 함을 강조한다. 피터스는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류 후손들에게 큰 짐을 남기는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한다.

기독교는 창조론, 종말론 등의 교리를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윤리적인 자원들을 축적해 왔기 때문에 두 영역 간의 대화는 인류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제안한다. 비록 이 책은 최근의 뇌과학 및 유전학의 성취와 4차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격변을 체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술된 것이어서 한계는 있지만,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오늘과 같은 격변기에 신학과 과학의 만남의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루어지는 테크토피아(techtopia)는 유토피아(utopia, 혹은 eutopia)가 될 것인가, 디스토피아(dystopia)가 될 것인가?"이다. 오늘 인류에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은 없다.
우선 테크토피아에 대해서 살펴보자. 최근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뇌의 10년'과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마음의 10년'을 통하여 과학자들은 뇌와 인간 정신의 본질에 관한 연구에 획기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이제 이와 같은 뇌과학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는 인간에 관한 탐구(심리학, 철학, 신학 포함)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2016년 2월에 클라우스 슈밥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처한 테크토피아의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뇌과학, 유전공학, AI, 나노과학, 빅데이터, 가상/증강현실, 사물인터넷(IoT) 등 분야의 발전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은 물론 상상도 해보지 못한 기술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최신 과학기술들은 단순히 인간에게 유용성과 편이성을 제공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을 바꿀 가능성을 갖고 있다. 유발 하라리라는 이스라엘 역사학자는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라는 책에서 인류가 곧 죽음을 정복하게 될 것이고, 행복을 공학적으로 생산하여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고, 신체의 능력을 계속 증강함으로 인간의 능력이 신과 같아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과연 이와 같은 놀라운 과학기술의 성취가 인류의 미래를 유토피아로 만들 것인가, 디스토피아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논리적인 답은 유토피아이다. 당연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인류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영화와 문학이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그리고 있다. 만약 인류의 미래가 디스토피아가 된다면 그것인 과학 수준이나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개인과 집단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일 것이다.

중대한 문명의 전환기에 과학자들이 "우리는 테크토피아를 만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그것이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책임도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후자의 문제에 대해 전문가도 아니고 축적된 노하우도 없다. 신학은 유토피아에 관한 성찰을 과학자보다 오래 해 왔다.

유토피아(eutopia)는 복음(euangelion)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밀턴이 '실낙원'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는 인류가 어떻게 유토피아를 상실하고 디스토피아로 떨어졌는가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는 옛이야기를 단순히 반복한 것이 아니고, 그의 동시대인과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이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 맨 마지막 장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새사람의 뜻을 진화론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는 진화의 다음 단계서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출현할 것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진화의 방식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첫째, 이전에는 생명 유기체가 진화의 과정에서 선택권이 없었지만, 이제는 인간이 선택권을 갖고 진화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진화의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진다. 셋째, 이전에는 없었던 매우 큰 위험이 따른다. 그가 진화론을 거론하는 것은 진화론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진화의 다음 단계에 출현할 새사람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새사람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가장 완성된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다. 루이스는 60년 전에 오늘날 인류가 처할 위기를 예견하고 해법을 제시한 셈이다.

현재 신학과 과학의 만남은 이전과 같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기독교 교리를 변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신학의 특수 영역에 속한 과제로 인식되어서도 안 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 전체의 삶을 급속하게 바꾸고 있으므로 목회자들과 교인들도 이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중요한 참여자가 된다. 기독교인들은 과학기술에 관한 문맹 상태에서 벗어나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본성, 도덕성, 죄의 문제, 인류의 미래 등의 주제에 관해 깊은 성찰을 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아직은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기독교인들은 신학이 그동안 축적한 자원들을 열린 마음으로 과학자들과 공유해야 한다. 신학과 과학의 대화는 인류의 미래가 유토피아가 될 것인가 디스토피아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요 선교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대성 교수
연세대학교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