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창간 72주년 기획 '성경 속으로 들어가다' <3>

[ 창간 72주년 '성경 속으로 들어가다'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8년 01월 23일(화) 14:08

본보 창간 72주년 기획 '성경 속으로 들어가다' <3>무슬림 지역의 기독교 성지

▲ 무슬림 지역에도 기독교 성지가 많다.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 중 100여 곳이 오늘날의 요르단, 즉 무슬림 지역에 위치해 있다. 사진은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여리고의 마을 풍경. <사진=신동하 차장>

【팔레스타인ㆍ요르단=신동하 차장】 무슬림 지역에도 기독교 성지가 있다. 팔레스타인에 여리고와 사마리아가 위치하며, 인구의 92%가 무슬림인 요르단은 사실 성서의 땅이라해도 무방할 정도로 성지가 많다.

오늘날의 요르단은 구약시대에서 암몬, 모압, 에돔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 중 100여 곳이 오늘날의 요르단에 있으며, 출애굽 광야생활 중 38년을 요르단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보 창간 72주년을 맞아 현장르포로 무슬림 지역의 기독교 성지를 살펴본다.

* 여리고 (Jericho)
기자가 여리고에 무혈입성했다. 시대를 잘 만나 출애굽 백성처럼 염탐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여리고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띈 것은 뽕나무였다. 삭개오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올라간 그 나무다.

취재 자문과 안내를 해준 이강근 목사(유대학연구소 소장)는 "뽕나무는 고대마을에서 '중심'을 나타내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며 "자라는 속도가 빠르며, 밑둥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져 자라기 때문에 나무에 올라가기가 편하다"고 설명했다.

▲ 여리고성벽의 흔적이 남겨진 곳을 찾았다. 성이 건축될 당시에는 견고한 작업이었던 진흙벽돌을 겹겹이 쌓아올린게 육안으로 확인된다. <사진=신동하 차장>

여리고는 팔레스타인에 있다. 1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이다. 또한 고도가 가장 낮은 성읍이기도 한데, 예루살렘보다 고도가 900m 정도 낮다.

성경 여호수아의 정복사건에 등장하는 여리고성을 찾아가봤다. 고고학자들이 흔적이라고 추정하는 여리고성벽은 근접을 통제하지만 어렵게 허가를 얻어 다가가 살며시 만져봤다. 가까이서 보니 진흙벽돌을 겹겹이 쌓아올렸다. 당시에는 견고한 건축작업이었다고 고증됐다. 하나님을 따른 '믿음'은 이 견고한 성을 무너뜨렸다.


* 사마리아 (Samaria)
사마리아도 팔레스타인에 있다. 예수그리스도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쓰고 승천하기 전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라고까지 강조한 곳을 안가볼 수 없다.

사마리아의 마을을 두루 돌아보다 십자가가 새겨진 기독교인의 무덤을 몇호 발견했다. 무참히 파괴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무슬림 지역이다보니, 누군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사마리아 마을을 돌며 발견한 기독교인의 무덤이 처참히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다. <사진=신동하 차장>

사마리아에 세례요한기념교회가 있다고 해 찾아가봤다. 전승에 따르면, 교회 지하동굴에 세례요한의 참수된 머리를 보관했다고 한다. 사마리아와 세례요한이 무슨 관계일까?

이강근 목사는 "세례요한이 소외된 사마리아인들에게 우호적이어서 그의 참수소식을 들은 이들이 시신 일부(머리)를 수습해 지금의 교회 터에서 장례를 치뤘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 사마리아에 위치한 세례요한기념교회. 전승에 따르면 세례요한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굉장히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사진=신동하 차장>


* 그리심산 (Gerizim)
어둑해질 무렵, 팔레스타인의 그리심산으로 향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을 따라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각각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선포했다.

그리심산에 오르니 건너편으로 에발산이 보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겜 시내와 야곱의 우물, 요셉의 무덤 자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군사요충지라 완전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기자에게 다가와 일정 등 몇가지를 묻고 갔다.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야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 그리심산의 야경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아름답다. <사진=신동하 차장>


* 디셉 (Tishbe)과 엘리야고향기념교회 터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에게 맞서 강력한 용기와 신앙을 보여준 선지자, 엘리야. 열왕기의 주무대인 길르앗으로 피해 도망가야 했던 엘리야. 길르앗의 작은 마을 디셉이 그의 고향이다.

오늘날의 요르단 북쪽이다. 그곳에 그의 생가로 알려진 장소와 비잔틴시대에 만들어진 기념교회 터가 있다.

디셉은 예나 지금이나 작은 마을이다. 디셉이라는 깡촌에서 나고 자란 엘리야지만 당시 최대도시였던 사마리아에서 말씀을 전한다. 작은 시골교회에 어린이가 1명이라도 있다면 잘 보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않을까.

▲ 길르앗의 디셉이라는 작은마을에서 태어난 엘리야. 그는 용기와 신앙을 겸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고향에는 기념교회 터가 남아있다. <사진=신동하 차장>


* 헤스본 (Heshbon) 유적
요르단에서 일반 순례객이 갈 수 없는 현장을 단독 취재했다. 바로 헤스본 유적 발굴 현장이다.

아모리 왕 시혼의 도성인 헤스본은 민수기 21장 25~28절에 근거해 모세가 출애굽하며 격파한 곳이다. 사사기에는 암몬이 공격해오다 입다에게 퇴각한 곳으로 나온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며 격파한 곳인 헤스본은 현재 유적 발굴이 한창이다. <사진=신동하 차장>

요르단에서 취재를 도와준 하대식 목사는 "여러 문명이 쌓여 언덕이 생긴 곳을 '텔'이라고 하는데, 헤스본이 텔이다. 10개의 제국이 다스린 흔적이 있다"며 "헤스본을 시작으로 해서 길르앗산지가 시작된다고 학자들은 본다"고 설명했다.

하대식 목사는 "헤스본 유적은 요르단의 경제사정이 넉넉지 않아 안식교 계통의 앤드류대학교 고고학팀에서 돈을 대고 발굴관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발굴된 유적은 로마시대 때 밀을 저장한 창고와 12~13세기 이슬람왕조가 무기를 두었던 장소, 비잔틴시대 목욕탕 등이다.


* 그릿 시냇가 (Kerith)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수년 간 가뭄이 들 것을 선포하고 몸을 숨긴 장소다. 이곳에서 시냇물을 마시고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었다.

시내라고 하지만 물이 상당히 말라있어 의아심을 가졌다. 이강근 목사는 "상류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수로를 만들어 농업지대로 끌어가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 엘리야가 몸을 숨긴 장소인 그릿 시냇가. 생각보다 가물었다. <사진=신동하 차장>

시냇가 주변으로 예전부터 방앗간이 많았다고 한다. 곡식을 넘치게 찧을 정도로 땅이 비옥했기 때문이다.

현재 흔적이 남은 방앗간을 들어가봤다. 맷돌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강근 목사는 "그릿 시내의 흐르는 물을 유도해서 낙차를 이용해 떨어뜨리면 그 힘으로 맷돌을 돌렸다"고 설명했다.

▲ 그릿 시냇가에서 끌어올린 물로 곡식을 빻았던 예전의 방앗간. <사진=신동하 차장>


* 느보산 (Nebo)과 모세기념교회
"이제 약속의 땅에 왔다!" 모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야 40년을 돌다 가나안이 코앞인 느보산 정상에서 파란만장하게 죽음을 맞는다.

해발 800m의 느보산 정상에 올랐다. 현장에 가보니 실제로 가나안 땅(요단강 서편)이 가까이 펼쳐졌다. 당연히 드는 생각은 "모세는 얼마나 아쉬웠을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명을 완수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모세가 죽기 전 가나안 땅을 바라보던 느보산 정상에 모세기념교회와 전망대, 십자가 형태의 놋뱀 조각물이 있다. <사진=신동하 차장>

느보산 정상에는 모세기념교회가 있다. 교회 옆에 모세처럼 바라보라고 전망대와 십자가 형태의 놋뱀 조각물을 만들어놨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보니 다양한 형태의 예배당과 세례탕 흔적이 남아있다.

느보산을 내려오기 전 다시 한번 모세 전망대로 갔다. 기자가 모세도 아닌데 아쉬움이 계속 남았다. 그래도 광야길 40년을 달려와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부푼 기대감이 넘치는 곳이었으리라 위안을 삼고 하산했다.


* 아르논 (Arnon)
요단강 동편 고원지대에서 발원하여 모압과 아모리의 경계(민 21:13)를 흘러 사해로 들어가는 강이며, 여러 지류들이 합류한 골짜기이기도 하다.

아르논은 구약에서 많이 언급된다. 가나안 정복 후 르우벤 자손의 남쪽 경계가 되며, 사사시대에는 암몬 자손이 그곳의 잃은 땅 회복을 요구했으며, 아람 왕 하사엘은 이 유역을 점령했다.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모압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아르논을 언급했다.

▲ 구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아르논 강, 혹은 골짜기로 불린다. <사진=신동하 차장>


* 페트라 (Petra)
페트라는 '바위 도시'다.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가는 통로였다.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건설된 이 도시의 현재 위치는 요르단 남서부 내륙 사막지대에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직접 가보니 입이 쩍 벌어진다. 완전한 바위산 지대로, 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협곡의 색이 달라보였다. 형형색색의 협곡을 따라 걷다보면 보물창고라고 불리는 '알카즈네'가 나온다. 기둥이나 벽을 세우지 않고 바위산과 암벽을 깎아 만든 6개의 원형기둥과 헬레니즘 양식으로 건축된 신전이다.

▲ 바위 도시 페트라는 출애굽과 관련있지만, 사도바울의 전도지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진=신동하 차장>

신전만 있는게 아니다. 원형경기장 옆으로 나있는 돌로 만든 계단을 1시간 정도 힘들게 올라가니 수도원이 나왔다.

이강근 목사는 "수도원은 비잔틴시대 때 만들어졌다. 건축물 안쪽에 십자가 모양이 있어 수도원으로 추정한다"며 "수도원이 건너다보이는 서쪽 건너편에 가나안 땅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페트라에서는 기독교유적 13곳이 발견됐다고 한다. 사도바울에게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에서 아라비아를 페트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 제라시 (Jerash)
요르단 북부의 도시다. '중동의 폼페이'로 불릴 정도로 고대 로마와 그리스를 옮겨놓은 듯한 유적이 있다. 특이점은 수많은 신전들 사이로 교회 터가 남아있다.

하대식 목사는 "기독교가 공인된 비잔틴시대에 교회들이 많이 세워졌지만,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략과 지진 등으로 폐허가 됐다"고 설명했다.

▲ 제라시에는 비잔틴시대에 교회가 많이 세워졌지만 훗날 파괴되고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사진=신동하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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