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하는 교회가 누리는 은총

[ 주필칼럼 ]

변창배 목사
2017년 12월 19일(화) 13:25

총회 파송 선교사가 1500명을 넘어섰다. 90개 이상의 나라에 나가서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총회 파송 선교사가 해마다 30여 명씩 늘고 있다. 새롭게 파송을 받은 선교사의 각오는 남다를 것이다. 파송하는 교회도 기대를 갖고 힘써서 기도하며 후원할 것이다. 노회나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까지 합하면 4,000명 이상 될 것이다. 이들의 헌신과 후원교회의 정성에 감동이 된다.

우리 총회의 첫 선교사는 중국 산둥성으로 파송을 받은 박태로 목사였다. 산둥성 선교는 1912년 9월 1일에 회집한 제1회 총회의 결의로 시작되었다. 생각해 보면 하나의 기적이었다. 당시 장로교인은 12만 7228명에 불과했다. 세계교인은 5만 3008명이었다. 목사는 선교사를 포함해서 128명이고 장로가 225명이었다.

창립총회 총대도 목사 96명, 장로 125명이었다. 목사 중에서 외국 선교사가 44명, 한국인 목사가 52명이었다. 게다가 1912년은 일제 식민지가 막 시작된 때였다. 제주도나 일본, 블라디보스톡, 북간도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한 일이 있으나,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는 산둥성 선교였다. 작고 가난한 피식민지 교회가 감히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다.

산둥성 선교 헌의는 1912년 7월 1일에 모인 제2회 황해노회에서 이루어졌다. 김익두 목사가 주도했다. 9월에 모인 총회는 1년 중에 한 주일을 세계선교주일로 지키고 기도와 헌금을 할 것과 중국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했다.

박태로 목사를 산둥성 선교사로 임명했다. 1년 뒤에 김영훈 목사와 사병순 목사를 추가로 파송했다. 이 일을 뒷바라지한 분은 길선주 목사였다. 1907년 독노회 시절부터 6년 동안 전도국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나라는 식민지가 되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세계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는 소명감의 결실이었다.

첫 선교사의 파송만 기적이 아니다. 해방된 뒤에도 기적이 이어졌다. 해방 후 첫 타문화권 선교사는 태국으로 파송된 최찬영, 김순일 선교사 두 가정이었다. 이들은 1956년에 파송을 받았다. 1956년은 통합과 합동의 교단 분열 이전이었다.

2016년에 태국 선교 60주년을 두 교단이 함께 축하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불과 3년 만의 일이다. 한반도에는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었다. 태국은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였다. 60년대 민족복음화 운동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전쟁으로 파괴된 가난한 나라, 작고 보잘 것 없는 교단이 두 가정을 파송한 것이다.

산둥성으로 파송된 방지일 목사는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 참전으로 핍박을 받았다. 다른 외국 선교사가 철수한 뒤에도 남아서 중국 교인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결국 유엔의 중재로 홍콩으로 추방된 뒤 1957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산둥성 선교사의 귀국과 태국 선교사의 파송이 엇갈린 것이다. 방지일 목사는 "닳아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는 평소의 말씀처럼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2014년 10월, 103세로 소천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의 보고에 따르면 2016년 말 현재 한국선교사는 2만 7205명이다. 이 숫자는 2015년과 동일하다. 선교사의 증가가 멈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2017년 말 현재의 선교사 집계가 발표될 것이다. 전망은 밝지 않지만 결과는 궁금하다.

산둥성 선교와 태국 선교의 경우에 보는 것처럼 우리 교단은 선교열로 뭉친 교회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애초부터 선교적 교회였던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장도 이런 열정을 보신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 한국의 경제성장이나 민주화도 이런 선교열을 불사르도록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었을까. 성장이 되었기에 힘 있게 선교하였고, 민주화되었기에 긍지를 갖고 선교를 감당했다.

교단 선배들의 이러한 선교정신은 교세 감소 시대에 본받아야 할 모범이 아닐 수 없다.

변창배 목사
총회 사무총장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