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하나님

[ 목양칼럼 ]

김수훈 목사
2017년 12월 19일(화) 13:23

어느 추운 12월의 아침 교회 현관 의자에 웬 쌀이 놓여 있었다. 두 개였는데 하나는 비닐에 담겨진 쌀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은 마대 자루에 담겨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쌀들은 모두 먹다가 남은 것처럼 보였다. 비닐에 담긴 것은 오래 된 듯 색이 변했고. 마대자루의 쌀은 최근까지 먹다가 남은 듯 조금 담겨 있었다. 그렇게 남겨지고 변해버린 쌀을 보면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 교회가 참 불쌍해 보였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이웃돕기를 할 때도 좋은 것으로 주지 않으면 상처 받는다고 난리다. 쌀을 줘도 좋은 쌀을 준다. 가난한 것은 죄가 아니다. 삶이 조금 어려운 것뿐이다. 그러기에 요즘은 이웃을 돕는 일에도 상대방에 대하여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한다.

그런데 교회 앞에 놓인 그런 쌀을 보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우리 하나님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다. 그 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정말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도 못하고, 버릴 수는 없고, 주일 점심에 밥을 지어 먹자니 난감하다. 고민이다. 그리고 마음이 슬펐다. 우리 하나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불쌍해 지셨나 싶다.

가난했던 시절 성도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알았다. 어릴 적 어머니는 아버지가 벌어 오신 월급봉투를 받아 들고 먼저 십일조를 가리고, 감사한 마음을 준비했다. 쌀이 풍성하지 못했던 시절 밥을 짓기 전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며 성미(誠米) 항아리에 쌀을 담아냈다. 가정에서는 먼저 어른이라고 하면서 자식들을 기다리게 하며 질서를 생각했다. 그 시절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었고, 정말 멋있었다. 그래서 교회 하나님 앞에 가면 나도 덩달아 멋있어 지곤 했다.

그 하나님이 오늘의 우리를 이렇게 풍요롭고 살만큼 해 주었더니 이제는 거꾸로 된 것 같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불쌍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차마 예물이라 하기도 쑥스러운 정성도 없이 드려지는 헌금을 볼 때 더욱 그렇다. 헌금을 무슨 불우이웃 돕기처럼 생각한다. 신앙인의 기준은 한상 '먼저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 먼저를 알기는 하지만 막상 늘 내가 먼저인 것을 어찌해야 할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말면서도 머리와 마음과 몸이 다 따로 돌아간다. 그래서 갈등이고 고민이다.

이제는 이런 갈등, 이런 고민이 없었으면 좋겠다. 무조건 하나님 먼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을 더 이상 불쌍하게(?) 만들지 말자.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창조주의 자존심이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한 해가 오는 듯하더니 또 그렇게 간다고 한다. 뭐가 그리도 바쁜지, 무슨 할 일이 또 그렇게 많은지 세월은 늘 그렇게 빨리 가려고만 한다. 기왕에 왔으니 머물러 이야기도 하고, 쉬었다가 가면 얼마나 좋으련만 세월은 늘 그렇게 바쁘기만 하다.

벌써 12월이다.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의 계절,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동방의 박사들이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드리듯 감사함으로 제대로 준비하자. 2017년이라고 하면서 왔던 세월은 벌써 12월만큼 가고 있다. 참 빨리도 간다. 하나님 먼저의 신앙으로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의 삶에도 풍성한 열매가 가득한 그런 성탄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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