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약속

[ 목양칼럼 ]

신경희 목사
2017년 11월 22일(수) 09:54

한낮의 찌는 더위가 여전한 날씨였다. 후텁하고 끈적한 습도가 온몸의 기운을 빼고 있었다. 날씨로 인해 힘들어 갈 무렵, 화장이 끝났다는 방송이 들렸다. 유가족들 몇 분과 조문객들이 함을 들고 유골실로 향했다. 한줌의 재로 변한 딸의 모습을 보고 연로하신 어머니가 오열했다. 그렇게 경화는 한줌의 재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안겼다. 경화가 둥지교회와 인연을 맺은 지 불과 2년만이었다. 한줌 재로 변한 경화의 나이는 서른 일곱살 꽃다운 청년이었다. 이경화! 나이 37세, 경화는 중증장애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8세에 교통사고를 입어 경추를 다쳤고 하반신 마비를 입었다. 경화는 운동선수였다. 그것도 투포환을 던지는 선수로 전도유망했다고 한다. 경북 대표로 체전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장애를 입고 5년 동안 좌절과 절망 그리고 죽음까지 생각하고 실행하게 된다. 우연히 알게 된 자원봉사자로부터 신앙을 갖기 시작하여 고향인 의성을 떠나 대구로 왔다. 그런데 또 다시 신장이 나빠져 투석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혈액투석을 받다가 혈관이 다 막혀서 복막투석을 하였다. 하루에 여섯 번씩 네 시간마다 복막투석을 하는 것은 보통의 의지로 할 수 없다. 신앙생활도 잘하지 못했고, 교회도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서 발걸음을 끊었다.

그러다가 둥지교회를 알게 되었고,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심방을 갔더니 경화가 "목사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말끝을 흐렸다. 어려운 부탁인거 같았다. 얼른 내가 말했다. "뭔데 말해봐라!" 경화가 대답한다. "목사님, 엄마가 보고 싶은데 고향에 한 번 같이 가면 안되는가요?" 처음으로 나에게 부탁한 것이 부모님이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 가자!" 그렇게 며칠 후 경화와 나는 전동휠체어를 승합차에 싣고 의성 부모님을 만나고 돌아왔다. 행복해하는 경화의 모습에 덩달아 내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의성을 다녀오면서 경화의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것이다. 한 달쯤 후에 포항을 다녀왔다. 20년 만에 바다를 본 경화는 포항 바다를 다 담을 만큼 기뻐했다.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먼저 약속을 했다. 다음에는 부산 해운대를 거쳐 광안리도 가자고 했다.

그 약속을 하고 두 달이 지나서 경화는 한줌의 재가 되었다. 끝내 부산은 가지 못했다. 결국 내가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하였다. 아니 지킬 수가 없다. 장애인 사역을 하면서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이 참 많다. 37세 청년 경화, 45세 김순녀 집사, 39세 최요한, 55세 전명현 집사, 어디 이분들 뿐이겠는가? 이 땅의 둥지교회 가족보다 하늘의 하나님 가족이 더 필요하셔서 데려 가셨다. 그야말로 그곳은 눈물도 없고 고통도 아픔이 없는 곳이기에!

그럼에도 안타깝고 슬픈 건 우리의 몫이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에 비해 수명이 짧다. 장애로 인해 또 다른 장애를 갖게 될 확률이 높으며, 상해를 입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장애인들과의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한다. 경화를 잃고 난 뒤에 지키지 못한 약속을 늘 안타까워 하면서. 그 약속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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