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여, 자유함을 회복하라"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 루터종교개혁 연재 후 한국교회를 위한 제언<끝>

김종현 선교사
2017년 11월 22일(수) 09:49
   

우리 독일현지 선교사들은 지난 1년여간 13회에 걸쳐 한국교회 앞에 현지의 관점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한국교회를 위한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그 의의와 의미들을 전달해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필진들과 동료선교사들이 모여 '루터 500주년의 유산과 한국교회를 위한 어떤 제언을 할 수 있는지' 토론을 하였고, 전체적인 내용을 필자가 요약하여 필자의 언어로 재구성해보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우리 한국교회, 이렇게 달라지길 기대한다.

1.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
"당신이 하는 일도 참 귀한 일입니다"
이 말은 우리교회에서 설교전에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다. 때로 대표기도속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 "한 주간 세상 속에서 살다가 이렇게 거룩한 예배당에 나와…" 이런 이분법적인 성과 속의 분리는 결국 주의 자녀들이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사는 법 대신에,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서 빠져나와 거룩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법만을 가르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20년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통해, 그동안 중세교회가 그들의 존귀함과 상대적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서 신자를 영적인 신자와 세속적인 신자로 구분했던 프레임을 깨뜨렸다. 더 이상 성직자가 하는 일만 성직이고, 신자가 하는 일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기초한 '만인제사장(Priestertum aller Glaubigen)'설은 단순히 사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직접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의미보다 더 큰 의미와 파장이 담겨있는데, '모든 직업이 다 귀하고 소중하며 거룩한 주의 일'이라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제사장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일하게 된 그 일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과 함께 살 특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 곳이 바로 주님이 계시는 곳이고, 그 일을 하는 방식에도 거룩함이 깃들여지고, 그 일을 통해 얻는 유익도 주님께 영광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신자들을 교회의 거룩한 감옥에서 놓아주어야하고, 풀어주어야한다. 거룩함이 교회안에만 있고 성직을 하는 이들이 뭔가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한국교회의 중세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온 세상을 거룩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일상의 삶과 직업속에서 신자들이 거룩한 소명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신자들이 주님과 함께 일하고, 주님과 함께 거룩한 뜻을 이루며 살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성도들의 거룩함을 돕는 곳이 되어야 한다.

2. '신앙의 양심'으로 사는 자유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1521년 마틴 루터가 자신을 소환한 황제 앞에서 목숨을 걸고 한 말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이 장면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인류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이미 비슷한 방식으로 100년 전 프라하의 얀 후스가 화형을 당한 것을 알고도 루터는 자신의 '신앙의 양심'을 따라 보름스를 향하여 갔고, 결코 자신의 뜻을,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신된 신앙의 양심을 철회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미 아우크스부르크(1518년)에서도 추기경 카예탄을 통해서 계속 요구했던 말은 '레보코(Revoco; 나는 철회한다)' 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성경만이 가진다고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 나는 결코 취소할 수 없다"고 말하며 말씀으로 확신된 것을 철회하지 않았다.

말씀은 이처럼 한 사람을 엄청난 권력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고, 믿음으로 상황을 돌파하게 한다. 말씀이 우리를 움직이게 할 때, 우리는 세상 앞에서, 그리고 부조리한 현실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나의 신앙적인 양심을 철회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며 살 수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경공부는 정말 열심히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 말씀이라도 나를 '참'으로 돌려놓은 그 말씀 앞에서 정직할 뿐 아니라 신실하게 순종하고, 그 말씀 앞에서 드린 내 고백을 신앙의 양심으로 지켜나가야할 것이다. 단 한 말씀이라도 내 안에 확신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명을 드릴 말씀으로 받고, 그 신앙적 양심으로 세상 속에서 담대히 살고, 주님께 그 양심을 지켜갈 수 있도록 날마다 도움을 구하며 오직 말씀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유함을 회복해야할 것이다.

3. 함께하는 '연대(Solidaritat)'의 자유
"루터와 헤어지기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루터의 둘도 없는 동역자 필립 멜랑히톤의 말이다. 루터도 "나의 가장 소중한 필립"이라며 화답하였다. 주의 일을 할 때 누군가 함께 같은 마음으로 공감하고 헌신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신자일 것이다.

이렇게 동역자였던 멜랑히톤 뿐 아니라, 그를 보호해주고 지지하고 후원했던 프리드리히 선제후, 루터와 결혼하여 지혜롭게 내조를 잘해서 루터의 대적자들이 루터보다 더 싫어했던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루터의 임종 때까지 그의 얼굴을 그려냈던 화가 종교개혁자 루카스 크라나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부터 루터를 지지하고 은밀히 지원했던 요한 슈타우피츠, 루터의 고충을 들어주고 말씀으로 위로했던 비텐베르크의 목회자 부겐하겐 등 너무나 많은 이들이 그의 곁에서 같은 마음으로 '개혁'이라는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연대했다.

개혁이란 거창하게 말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Coramdeo) "우리 이대로는 안되겠다. 우리 이렇게 신앙생활해서는 안되지 않느냐, 우리 교회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지 않느냐"는 정직한 부담감에서 나온 '신앙의 양심'에의 실천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여전히 개교회중심주의에 갇혀있다. 그것은 교회의 문제나 어려움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적교회로서의 모습은 없고, 교회의 부흥도 개교회중심주의이고, 교회의 문제도 우리문제이니 개의치말라며 개교회만의 문제로 교회의 공적영역을 거부해 버린다.

한국교회는 이제는 개교회의 틀을 벗어버리고, 함께하고 연대하는 영성과 안목을 가지고 대사회적인 접근을 해야한다. 루터의 개혁은 교회개혁일 뿐 아니라, 대사회개혁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다시 새롭게 되어야할 한국교회가 개교회의 막중한 책임과 달콤한 폐쇄성을 넘어서, 연대하는 기쁨과 자유함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 독일현지 선교사들의 글을 대신하여 마무리하려 한다.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을 보내주신 유럽선교사회 선교사님들과 연재를 사랑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종현 선교사
프라이부르크
자유성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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