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교회의 시작

[ 목양칼럼 ]

이경우 목사
2017년 09월 01일(금) 15:25

2010년 겨울은 신장이식수술을 하고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 나와 상담교육센터를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그 무렵 창원지방법원 소년부재판을 참관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라 그것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정말 많은 아이들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재판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피고인석에서 홀로 재판을 받던 한 남학생이 있었다.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학생은 담당판사의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 끝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해졌고 장내는 숙연해졌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은 소년이 "바빠서 오시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했을 때는 한편으로는 마음을 쓸어내렸지만 엄연히 계신 부모가 참석하지 않은 데 대해 절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어린 자식이 재판을 받는 자리에 오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일도 아닌 재판이지 않은가!

부모가 이혼한 뒤 극심한 방황 끝에 비행까지 저지르고 만 소년의 사연도 마음에 깊이 남았다. 아버지와 크게 다툰 뒤 가출했다가 재판정에서 화해하며 부둥켜 울던 그 소년을 보면서 함께 자리했던 아내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오후 내내 진행되었던 재판을 지켜보고 나온 우리에게 판사님은 가정으로 돌아갈 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 청소년들을 돌보지 않겠느냐고 의사를 물었다. 만약 재판을 보지 않았더라면 한사코 사양했을지도 모를 일이나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본 뒤에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예비하시고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10명 정도의 아이들이 숙식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과 생활 물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은 정말 가난했다. 20대에 일구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으로 사라진 뒤 그저 하나님께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나는 33살에 신학을 시작하였다. 그 뒤 전도사와 부목사로 사역했던 나에게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기에 필요한 것은 채워주시리라 믿으며 간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역시나 하나님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지인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채워주셨고, 마침내 2011년 4월 범천동에 어울림청소년회복센터(남자청소년)를 개소했다.

개소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개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걱정과 근심, 종종걸음을 쳤던 순간들은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돌출되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부족한 먹거리와 생활비 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 심심찮게 발생하는 사건사고, 이웃의 차가운 시선 등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끊임없이 불거졌다. 특히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변하지 않는 아이들을 마주할 때는 극심한 좌절감에 시달려야했다. 아이들을 돌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사람은 어찌 이리도 어리석을까? 개소한 지 1년이 다 되어갈 즈음에야 인간의 의지와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었다.

더 이상 아이들과의 예배를 미룰 수 없었다. 기존 교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상황을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눈감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일정한 공간을 마련하여 아이들과 예배를 드리는 한편 교회개척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2014년 2월 부산청소년교회(부산동노회)가 설립되었다.

이경우 목사/부산청소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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