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하는 지구를 치유하는 묘약은

[ 연재 ] 환경운동가 최병성 목사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최병성 목사
2017년 08월 09일(수) 09:45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원하셨고, 참 행복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들을 알려주셨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많은 공생애 가르침 중 여덟가지 행복 이야기를 가장 첫 번째 자리에 놓았다.

마태는 팔복을 신앙의 벽돌들을 쌓아가야 할 주춧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수님이 제시하는 행복의 비법과 우리가 원하는 행복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의 가난 온유 의로움 자비'는 우리가 살아가는 소비 사회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갈망과도 맞지 않는다. 예수의 방법처럼 살았다가는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기 십상이다.

2000년이라는 너무나 큰 시간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하루가 다르게 급격히 변하는 소비사회의 특성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2000년 전의 사람들에게도 최고의 가치는 행복이었다. 시대는 달라도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가 많고  자살률 역시 최고다. 예전엔 꿈도 꾸지 못한 큰 집과 편리한 물건들과 멋진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지만, 우리 마음은 외롭고 공허하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금 행복하니?"라며, 지금의 내 성취와 소유한 물건으로 얼마나 행복하냐?고 묻고 있다. 행복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쇠는 무엇일까? 지금 내가 찾고자 애쓰는 소유와 성취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절망하고 자살하는 것일까? 이제 참 행복에 이르기 위해 우리 신앙의 변화가 필요한 때다. 

오늘도 더 빨리, 더 많이~를 추구해보지만 만족은 없고, 지구는 과도하게 남용되며 신음하고 있다. 소비사회는 가난한 사람과 힘없는 자연에 대한 착취와 억압 위에 세워진 폭력적인 문화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더 많은 누림과 풍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결핍상태를 의미하는 가난은 불편과 고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이란 물질적 결핍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가난을 통해 하나님의 부를 누리는 신비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풍요를 깨닫게 되면 예수 대신 다른 것을 채우지 않는 소박한 삶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러기에 톨스토이는 "세상은 '가난'이란 단어를 '불행'과 동의어로 만들었지만, 사실 그것은 '행복'의 원천이다”라고 했다. 소박한 삶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예수가 주는 어떤 선물이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기를 즐거워한다. 소박한 삶은 새 인생의 시작을 의미한다. 소박함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하는 터전이 되기 때문이다.

참 행복의 길을 찾는 신앙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나와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인 지구도 행복해지는 방법이 예수님의 팔복을 살아감에 있다. 소유에 병든 우리 신앙을 치유하고, 신음하는 지구를 치유하는 묘약이 예수님의 팔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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