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RC 여성안수에 대한 신앙선언문

[ 여전도회 ] '女 소명 인정이 일치의 첫걸음'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7년 08월 03일(목) 08:41

여성 안수에 대한 신앙 선언문 신앙 선언 :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여성과 남성 모두를 교회의 모든 사역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부르신다. 이 선언은 여성과 남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등하게 창조되었기에 동등한 존중과 존엄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우리 신념을 증거한다. 이 선언은 모든 세례받은 자의 심오한 일치를 증거한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여성과 남성을 영적 리더십 사역으로 부르시고 그 소임을 수행할 은사와 은혜를 그들에게 부여해 오신, 수백 년에 걸친 우리 경험을 증거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살아가는 문화적 상황의 일부는 이 선언에 배치되는 사상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종종 반문화적이 되라는 요구를 받는다. 신학적 통전성과 정의의 당위성 때문에 세계개혁교회커뮤니언(WCRC) 교회들은 연대하여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입장에서 세례와 섬김을 통해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는 것을 반추하도록 하겠다는 헌신을 과감하게 선포해야 한다.

WCRC 교회들은 이제 그러한 소명을 체험하고 교회의 리더십과 섬김 사역에 필요한 은사를 보이는 여성을 안수사역에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공동 실천이 될 것이라고 서약한다. 그들의 채용과 사례도 남성과 같은 기준에서 결정될 것이다. 상황 우리는 왜 지금 이 선언을 하는가? 미국 미시건주 그랜래피즈 통합총회 여성 사전모임에서 나온 여성과 남성 간의 전적 협력에 헌신하기 위해 실행위원회 대표의 50%를 여성이 맡는 것 이외에도 커뮤니언에서 여성안수가 법적 구속력을 가지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펼쳐졌다. 통합총회는 또한 안수가 커뮤니언 이해에 핵심적이라고 확언하고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말씀과 성례 사역에서 자기 은사를 구체화하라고 부르신, 소명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일치가 실현될 수 없다.”라고 선포한다.

승인된 건의안대로 WCRC 는 “…여성 안수를 촉진하고 커뮤니언에서 여성안수가 구속력을 발휘할 순간까지 일하기로” 헌신했다. 우리는 이 지시를 성취하기 위해 신앙 선언문을 작성해야 한다고 믿는다. 본 문서는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한 시도이다.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일어나는 여성학대는 여성이 본성상 남성보다 열등하며 남성을 섬기고 복종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그래서 여아는 남아보다 덜 가치 있고 여성은 존중도 존엄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보는 일부 문화권의 오래된 견해를 반영한다. 가족 중 소녀와 엄마가 맨 마지막에 음식을 먹는 일이 빈번하고 가장 형편없는 교육을 받아 삶의 기회가 제한되는 것을 본다. 소녀와 여성에 대한 집단강간이 전쟁 무기로 활용되어 끔찍한 상흔을 남기는 것을 본다. 여성이 집 안에 갇혀 더 넓은 사회생활이 금지당하는 것을 본다. 심지어 선진국에서조차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노동을 하고도 보수가 더 적으며, 의료혜택이 제한되기도 하고 국가 통치구조에서 여성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일이 너무나 드물다. 교회가 여성 인권 유린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적 생활을 통해 여성이 열등하고 교회 안수사역 리더로 봉사하는 데 무능하다고 믿는 모습을 보일 때 교회의 도덕적 권위는 훼손된다. 여성들은 교회의 여성안수 거부를 적법한 존엄성을 박탈하는 압제로 체험한다. 심지어 여성이 안수를 받는 경우에도 차별과 소외를 자주 겪는다. 오늘날 지구촌 전역을 망라하는 다양한 문화권에 뿌리를 내린 개혁주의 가족에 속한 교회들은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동등하게 존중과 존엄을 누리기에 마땅하며 교회의 제도적 생활에서 그러한 신념에 대한 확증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세계 앞에서 증거할 기회와 의무가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여성안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함에 대한 강력한 증거다.

그것은 또한 교회 생활을 활기차게 만드는 여성의 풍부한 리더십 은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성경적 토대 : 창조와 새 창조 개혁주의 신념과 실천의 토대인 성경은 여성안수 인정과 부정 양측을 지지하는 데 이용되었다. 사실 성경은 그것이 쓰인 가부장적 세계를 반영하고 동시에 도전함으로써 우리에게 성경을 풀이할 해석학적 렌즈를 정의하라고 촉구한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 복음에 비추어 읽되, 비판적인 성경적 학문과 엄격한 성찰, 그리고 신앙공동체의 기도로 분별을 통해 도움을 받는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이 방법은 단순히 분리된 본문을 공부하고 인용하는 것을 회피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전체를 위한 은혜에 따라 성경에 접근하되 타락한 세상과 압제 구조 앞에서 긍휼과 정의와 해방을 품게 된다. 갈라디아서 5:1: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복음이 선포한 평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지지해 온 비판적 학자들 안에 근본적인 변동이 일어났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여성안수가 전적으로 성경적인 명령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창세기 1:27 과 갈라디아서 3:28 두 본문에 초점을 맞추고 그 신념의 기초를 개관할 것이다. 창조 : 창세기 1:27-28: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새번역). 이 구절은 성경 내러티브의 초창기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여성의 고유 역할에 대한 이해에 근본적이다. 이것은 평등과 연대의 선언문이다. 이 구절이나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한 다음 구절에서도 성별에 따른 노동의 분리나 여성 종속이 암시되어 있지 않다. 

여성안수 반대자들은 종종 창세기 2:18 을 지목한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자를 짝으로 만들어 주겠다.”(NRSV 직역). “돕는 자”란 단어는 예속의 징후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그 단어는 정반대 의미를 함축한다. 똑같은 단어가 히브리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즉 강력한 지지 자료이다. 창세기 2:23 에서 남자가 여자를 “[자기] 뼈 중의 뼈요 [자기] 살 중의 살”로 인식한 것은 다시금 상호성과 연대의 선언이다. 여성은 생물학적 본성에 의해 남성보다 열등하다거나 남성보다 하나님의 형상을 덜 반영한다거나 그 역할을 출산과 가사 영역에 제한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가르치며 여성이 창조세계의 공적 책임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신학을 우리는 거부한다.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전 창조와 조화를 이루는 여성과 남성 간의 평등과 연대다. 타락 이후 여성과 남성 모두 그 관계들의 왜곡을 경험한다. 창세기 3:16 에서 여성은 죄의 형벌로 남편에게 예속되어야 한다고 듣고 남편은 그 땅의 저주와 노동의 형벌을 받는다. 그러고 난 후 성경 내러티브는 족장사회를 묘사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히브리 성경에서 유대인 여성은 공적 리더십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에스더 왕비와 사사 드보라 그리고 미리암과 드보라와 훌다와 노아댜 같은 여선지자들에 관해 읽는다. 또한, 이집트에서의 현명한 히브리 산파들과 같은 능력 있는 여성들의 풍부한 계승이 성경 본문에 넘치고, 룻기에는 사랑스러운 룻이 나온다.

새 창조 : 갈라디아서 3:27-28: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입니다. 더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더는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더는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새번역). 예수님의 사역은 여성과 남성의 공개적 접촉이 엄격히 규제되고 있던 사회의 억압 실태에 대한 많은 도전을 묘사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막으셨다. 유출병 여인이 당신의 의복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셨고 여인을 고치셨다. 여성과 남성 제자들에 의해 에워싸여 있으셨고 그들에게 삶과 사역을 맡기셨다. 제자들 가운데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통치가 기존 생활방식을 뒤집을 거라고 가르치셨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우정 때문에 신학적 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신의 선교 이해에 도전한 수로보니게 여성을 용납하시고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셨다. 인습의 경계를 넘어 우물 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시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시고 그녀가 자기 공동체에 되돌아가 복음을 나누는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셨다.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교류하심으로써 그녀는 신실한 제자로 변화되었고 나중에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예수님은 부활 이후 여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을 보내시어 다른 이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전하라고 하셨다. 이러한 사례들은 예수 사역의 반문화적 성격을 예시하며 예수 사역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가치와 의미를 가리킨다 예수 부활 이후 예루살렘에 기도하러 모였던 제자 무리 속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일부 여성”도 있었다(사도행전 1:14). 오순절에 모두 모였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선포할 때 선지자 요엘의 본문을 취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마지막 날에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줄 것이고,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사도행전 2:17-18, NRSV 직역. 요엘 2:28-9 참조).

성령이 부어지신 이 새로운 하나님 통치 시대에 여성은 예전보다 훨씬 더 평등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빌립의 딸들과 같은 여선지자들, 남편과 함께 설교자 아볼로를 가르치고 바울의 여행에 동행했고 바울의 표현 마따나 그를 위해 목을 내걸었던 브리스길라, 그리고 가정교회들을 인도하는 여성들에 대해서 읽을 때 놀랄 필요가 없다. 바울은 자기 사역에서 여성 동역자들에 대해 온화하게 감사하며 말한다. 그들 가운데 사도 유니아, 겐그레아 교회의 사역자(또는 집사) 뵈베, 브리스길라와 마리아가 있다.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힌 이들도 있었다(로마서 16:1-16). 장 칼뱅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던 과부들(디모데전서 5 장)은 집사 직분에 속한 자들로 이해되었다. 첫 수백년 동안 활동한 여성 안수집사들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다. 우리는 고대 세례식의 일부인 갈라디아서 3:27-28 을 리더십 발휘가 전혀 기대되지 않았던 이들이 성령의 부름을 받는 새 창조의 맥락에서 읽는다. 신앙으로 부름받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모든 사람은 사회적으로 수용된 인간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의 재가를 받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성령의 사역으로 붕괴되었다는 점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 몸부림이었는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방인도 신앙의 선물을 받은 이상 할례를 강요하지 않고 공동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분명한 결정을 내렸다. 우리 교회 중 일부는 19 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더는 노예도 자유인도 없다”는 성구의 함축의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노예소유주가 될 수 없다고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 교회 중 일부는 성령께서 인종차별의 장벽까지도 깨뜨리셨고 인종적으로 분리된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또 다른 100 년이 걸렸다. 1982 년 오타와에서 모인 WARC 총회에서 우리 개혁주의 가족은 (교회 구조까지 확대된) 아파르타이트가 죄이며 도덕적,신학적으로 아파르타이트를 정당화하는 것은 “복음의 희화화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끈질기게 불순종하는 신학적 이단”이라고 선언했다.” 우리 교회들은 지금 세례받은 사람 가운데 더는 남성도 여성도 없다고 선언해야 할 역사적 순간에 서 있다. 이것은 남성이 더는 배타적으로 교회리더십을 점유하는 특권을 가진 게 아니라는 뜻이다. 교회 생활 속의 체험 가정교회가 공적 영역으로 전환하고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초창기 교회 여성은 교회 내에서 남성과의 동등성을 상실했다. 헬레니즘 세계의 이원론 사고 속에 살던 신학자들은 창조의 선성이라는 히브리적 신념을 상실했고, 희랍 철학과 로마법에서 여성의 예속과 열등과 같은 비성경적 견해를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성은 임신 과정에서 손상된, 결함있는 남성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수용했다. 중세 초기 성직자들과 함께 행진했던 동방의 일부 여성 집사를 제외하면, 중세 교회의 여성에게 가능한 유일한 공적 역할은 수녀였다. 그러나 어떤 수년들을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했다.

평신도 여성인 크리스틴 드 피상(Christine de Pisan)이 1400 년 경 시작한 여성의 본성에 관한 문헌 논쟁이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그녀는 신학자들의 전제를 도전했다. 마리 당티에르(Marie Dentiere)는 제네바 종교개혁 초기에 이 논쟁을 이어받아, 해방의 복음이 여성에게 말하고 쓰라고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그녀 자신이 그렇게 했다. 그녀는 “복음에는 남성을 위한 복음과 여성을 위한 복음이 따로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이 전통을 따라는 여성 작가들은 가톨릭 혹은 개신교 남성 신학자와 매우 다르게 성경을 읽고 신약 성경에 나온 여성의 다양한 역할을 언급했다. 이 여성들을 침묵하게 만들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2017 년에 500 주년을 맞은. 루터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티즘 전체에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이란 개념을 제공했다. 이는 모든 세례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신령한 일을 가르치고 서로에게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용서를 선포할 수 있다고 하는 권리다. 그러나 이 제사장직은 회중을 위한 공적 사역과 구분된다.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관을 거부했고, 혼인에 더 큰 존엄을 부여했으며, 여성이 공예배 중 회중 찬양에 참여하도록 권장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 사상이 남성 성직자만이 공적 사역을 수행하게 하는 전통을 무너뜨린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500 년이 지난 지금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온전한 이해했다면 공적 사역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동등성 요구된다고 선포할 때가 되었다. 개혁주의 가족 안에서 여성 안수는 이미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안트와네트 브라운(Antoinette Brown)이 최초의 회중교회 사역자가 된 1853 년 이후 회중교회는 여성 사역자를 안수해왔다. 1889 년 컴버랜드장로교회는 루이사 우슬리(Louisa Woosley)에게 안수를 주었다. 그러나 수년 동안 그 뒤를 따르는 장로교단이 없었다. 적어도 19 세기 후반 이후 여성 집사가 존재해 왔다. 여성 장로는 그보다 늦은 1930 년대 이후 나타났다. 그러나 20 세기 중반 이후 여성을 정기적으로 사역자와 장로, 및 집사로 임명하는 개혁주의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 대부분이 그렇게 하고 있다. 이와같이 여성이 모든 대륙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탁월한 신학자가 될 수 있고 알찬 사역을 할 수 있다는 풍부한 증거가 있다. 우리 교회들은 신실한 여성 리더들을 겪어 보고 하나님께서 진실로 여성들을 안수사역으로, 그리고 그들을 통해 교회를 건강하게 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을 확증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아직도 여성에게 안수를 주지 않는 교회에서 충격적인 경험이 반복되고 있다. 통상 안수사역과 관련된 기능의 실천이 안수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든 교회를 보면, 장로교 정치구조를 가진 교회들이 전형적으로 장로와 집사에게 할당하는 사역을 여성들이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안수를 거부하는 곳에서 여성들은 직분의 권위가 없이, 통치기구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도 없이, 그리고 안수 사역자들의 동료적 후원이 없이 그 임무를 수행한다. 목회자가 부족하거나, 남자들이 전쟁이나 선교지나 원거리에 있는 경우와 같이 유동과 이행이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유능한 여성들이 목회 기능을 감당하도록 부름받는다. 그들은 교회를 조직하고 공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하고 신학교에서 인도하고 가르치며, 목양적 돌봄을 제공한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이 신학적으로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직분의 권위가 없으며, 통치기구에 참여할 수 없고, 동료의 후원을 받지 못하며, 성찬식을 집례할 수 없다.

게다가 목회자보다 사례를 훨씬 더 적게 받는다. 개혁주의 전통은 안수를 사역 기능과 긴밀하게 묶는다. 여성에게 사역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위임했다면, 그들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이며 정의의 문제다. 조사 결과, 여성 안수를 주지 않는 우리 회원 교회들 대부분은 신학이 아닌 문화를 그 이유로 들었다. 일부는 세속 사회가 여성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살고 있다. 일부는 로마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가 압도적인 국가에서 소수자로서 이웃이 불쾌하게 여길 만한 행동을 삼가라는 에큐메니칼 압력을 느낀다. 이 문화적 압력은 대단하며 때로는 생명까지 위협한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세상에서 신실한 증거를 하려는 투쟁 가운데 그러한 도전에 직면해 왔다. WCRC 는 이 교회들과 연대하며 동행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문화의 억압적 측면을 초월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부름받았다. 1989 년 WARC 서울 총회 이후, 총회 마다 여성 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들에게 그 실천을 재고하도록 요청해 왔고 이 과정을 돕는 방법들을 개발해 왔다. 여성 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들에게 여성 사역자가 사역 기회를 동등하게 누리고 있는지, 같은 사역에 같은 사례를 받는지 조사하도록 부탁했다. 2009 년 여성과 남성 협력 사무소(WARC)가 작성한 설문조사는 모든 교회가 다 적절하게 응답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리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42 개 교단이 말씀과 성례 사역에 여성을 안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교회들의 분포는 다음과 같다. 유럽 7, 아프리카 18, 중동 3, 라틴 아메리카 5, 아시아 9 교회. 2010 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이 수치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지역협의회들을 통해 회원교회의 분명한 반응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통계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갱신하시고 변화시키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이 공동 신앙 선언을 선포함으로써 우리의 연합과 정의에 대한 헌신을 실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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