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걸이 아니야

[ NGO칼럼 ]

배성훈 목사
2017년 07월 26일(수) 11:07

출근을 위해 바삐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려는데 젊은 아가씨 한 명이 길을 막아섰다. 한 비영리 단체의 후원금 모금원이었다. 출근길만 아니라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꼭 후원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수고한다는 인사는 했을 거다. 그러나 지각할 것 같아서 수고한다는 인사도 못 하고 등을 졌다. 내 뒤에서 똑같은 일을 겪은 한 회사원이 혼자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웬 구걸이야."

예전에는 겨울에 자선냄비를 걸어놓고 후원금을 모금하는 구세군의 종소리가 대표적인 모금활동이었다면, 요즘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후원금을 모금하는 여러 단체의 캠페이너(campaigner)들을 손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결코 '구걸하는 사람'(beggar)이 아니다. 각 단체의 필요한 활동을 위해 개인 후원자들을 모집하는 활동가이다. 그러나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구걸'과 별 차이가 없다.

이렇게 된 거 진짜 유명한 '거지' 두 명을 소개한다. 한명은 종로구 혜화동 서울대학교 병원 앞에 있던 '원만이 아저씨'이다. 이 아저씨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외모, 나이, 빈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백원만, 백원만'해서 원만이 아저씨이다. 나이가 몇 살인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실제로는 굉장한 부자라서 대학로에 빌딩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있고, 원래는 법학과에 다니던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정신장애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다 IMF 이후 물가가 많이 올라서 원만이 아저씨도 '백원만, 백원만'하지 않고, '오백원만, 오백원만'이렇게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한명의 거지는 이집트의 성(聖) 안토니(st. Anthony, 251-?)이다. 안토니는 이집트 중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8세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의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평생 수도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에게 종종 제자들이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의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니 거지들과 같이 먹고, 거지들과 같이 생활하고, 거지들과 같이 잡니다. 도대체 그냥 거지들과 선생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때마다 안토니는 당황하지 않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나와 거지들은 별 차이가 없다. 아주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거지들은 자신을 위해서 구걸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구걸한다."

거리에서 만나는 수많은 비영리 단체의 모금원들은 자신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이 나만 위해 구하고, 나만 잘 살겠다고 구하면, 원만이 아저씨와 아무런 차이가 없을 거다. 그러나 남을 위해 구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구하고 있기에 우리 사회가 풍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거리의 많은 모금가들이여 힘내시라! 성 안토니처럼 그대들의 땀과 수고도 성스럽다.

배성훈 목사
주안복지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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