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육 개혁, 다시 점검한다 (8)신학교 인성교육

[ 특집 ] "신학교육, 인격 새롭게 하는 데 기여해야"

노영상 목사
2017년 07월 21일(금) 08:30

노영상 목사
호남신대 전 총장
한국기독교학회 회장

올해는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내건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종교개혁을 엄밀히 살피면, 대학의 신학교육과 시민교육의 개혁으로부터 시작하였음을 알게 된다. 1512년 루터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에 의해 세워진 비텐베르크대학의 성서학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인문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대학교육을 개혁하게 되는데, 이러한 대학의 개혁이 종교개혁과 유럽사회의 개혁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와 사회의 개혁 모두에 교육이 긴요함을 인식한 자들이었다. 루터의 개혁은 대학교육의 갱신으로부터 야기된 것으로, 그의 개혁은 거대한 교육 프로젝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위기의 원인을 분석하며 개혁의 방향을 진단하는 많은 세미나들이 있는데, 그러한 세미나들의 결론은 한결 같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위기는 크게 보아 목회자의 위기라는 것이다. 제대로 목회자의 교육과 훈련이 되지 않아 오늘 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종교개혁 시대와 같이 오늘날에도 신학교육의 개혁이 절실한 상황인 것이다.

필자는 지난 35년 동안 신학교육의 일선에 서 있었다. 아시다시피 신학교육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학문적 형성, 목회적 형성, 영성의 형성 세 가지다. 신학대학교를 통해 목회자 후보생들은 신학적 학문을 터득하게 되며, 목회적 기술들을 배우게 되고, 더 나아가 영성의 훈련을 하게 된다. 이에 있어 목회자의 인격형성은 영성훈련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며, 학문적 형성과 목회적 형성과도 많은 연관이 있다. 

최근 필자의 친구인 원동연 박사가 중심이 되어,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미래전략연구센터가 펴낸 책 '대한민국 국가미래교육전략'은 새 교육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수용성 교육을 강조하면서 인성교육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수용성 교육이란 교육 강자를 중심으로 한 수월성 교육으로서의 방법이 아니라, 피교육자 중 공부를 못하는 약자에 관심을 두는 교육이다. 특히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의 경우 그의 지력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그의 심력과 체력과 자기관리력과 인간관계력에 문제가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 박사의 이러한 교육이론은 5차원 전면교육이란 개념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오늘의 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이 5가지 요소 중 심력과 인간관계력이 인성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원 박사는 이런 인성적 관계가 바로 되지 않을 때에는 다른 요소들이 잘 작동한다고 하여도 공부를 잘 할 수 없게 된다고 언급한다. 

원 박사의 말과 같이 공부와 인성은 긴밀한 연관이 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의 인격성이 자리 잡지 않고는 진리에 대한 진정된 사랑이 불가능하다. 이런 성숙치 못한 문제들이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우리의 학문과 진리 선포는 다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인격을 바로 제도하지 못하는 교육은 바른 교육일 리 없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은 것이 목회자의 삶(윤리) 문제이다. 이같은 결과를 인성교육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즉 목회자 양성 기관인 신학대학교 교육에서 인성 교육 부분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 커리큠럼에 별도의 인성교육을 포함하는 경우는 드물다.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교육 내용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신학대학교는 성직자를 양성한 기관인만큼 인성교육은 선발과정에서부터 철저한 검증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육과정에서 성직자로서 손색이 없는 인성교육이 이어어져야 할 것이다. 

필자는 학문을 하며 한 가지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곧 그의 인격만큼 까지만 그의 학문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창의적이며 사회와 교회에 필요한 학문적인 전개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인격적 완숙미를 가진 사람들이다. 인격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채 설교를 하면 설교를 통해 자기의 정의로움과 실력을 과시하려 한다. 필자도 많은 설교를 하면서 한 가지 깨닫게 되었는데, 설교를 잘 하려면 설교를 잘 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간단한 진리다. 

우리는 학문과 인성이 별도라고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바른 인격적 성숙이 없인 어떤 학문도 지푸라기 같은 학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반대도 그렇다. 우리가 공부를 깊이 하면 할수록 우리의 인격도 점점 성숙해지는 것이다.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과 같이, 학문에 바르게 정진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부족하며 한계가 있는 존재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오늘 우리의 신학교육이 피교육자의 인성을 바로 함양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신학의 학문성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신학교육에 있어 인성교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학교육은 곧 인성교육이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는 학문, 학문을 학문답게 하는 인성의 힘을 다시 강조하는 신학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둘이 온전히 하나라는 것을 알 때, 우리의 학문에 대한 정진도 새로워지리라 확신한다. 성서연구와 신학연구와 영성훈련이 그의 인격을 새롭게 못한다면 그런 신학교 교육은 그 근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스스로를 크게 생각하면서 교단에서 학생을 무시하거나, 설교단에 서서 청중을 무안하게 하는 그런 언사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스승 밑에서는 훌륭한 제자가 나올 수 없다. 자신이 남에 비해 무언가 탁월하며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공허한 것은 없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