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하는 목사

[ 목양칼럼 ]

손주완 목사
2017년 07월 11일(화) 14:26

나는 목사다. 목사가 된지 24년이 되었다. 목사로 살면서 나는 늘 '목사란 무엇인가?'생각했다. 존경받을 만한 목사는 못된 것 같다. 나는 사회복지사다. 어르신들과 27년 여를 살면서 자연스럽게 복지와 관련된 공부를 하고, 복지시설의 운영자가 되었다. 신앙적인 동기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처음의 마음은 많이 퇴색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농민이다. 20대 후반 신대원을 졸업하고, 처음 강원도 원주의 시골마을로 이사 온 후 아내와 함께 농사를 쉰 적이 없다. 농사를 많이 지을 때는 농토의 빈틈이 없이 작물을 심고, 생산하고 판매했다.

하지만 지금은 논농사와 밭농사 일부만 한다. 나머지 터에는 매실나무와 밤나무 등을 심고 유유자적(悠悠自適) 농사를 짓는다. 그리고 친구 목사들과 함께 닭을 키운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 많이 등장했던 단어가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인간이 갖는 고민 중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나는 지금 직업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나'를 생각해 본다.

땀이 비가 오듯 흘러내린다. 날은 덥고 햇볕은 뜨겁다. 농사를 짓기 위해 노동을 하며, 양계장에서 닭들을 돌보느라 노동을 한다. 몸의 근육은 경직되고, 손에는 상처가 생기며, 신발에는 흙이 묻는다. 그렇게 나는 목사인데 노동을 한다. 노동을 하면서 세상을 본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는 노동하는 인간들이 보인다. 논과 밭에서, 깊은 주름에 패인 얼굴로 허리를 구부린 농민들이 보인다.

공사현장에서, 구릿빛 피부를 드러내고 물건을 옮기는 노동자가 보인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안전모를 쓰고 차량들을 안내하는 젊은이들이 보인다. 그들은 왜 이토록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가 되었고, 농민이 되었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많이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나는 땀을 흘리며 예수를 생각해 본다.

예수의 아버지는 목수였던 요셉이다. 예수는 아마 어려서부터 목수 노동의 현장에서 살았을 것이다. 예수가 살던 동네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의 나사렛이었다. 그 동네에는 많은 이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적어도 어린 시절의 예수는 그러한 노동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청년이 된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적어도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동을 했을 것이다. 예수는 땀을 흘리고 노동을 하며, 그 당시 노동자와 농민으로 살았던 많은 이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비유)에는 농사에 대한 이야기, 노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돈을 많이 벌고, 소위 일류대학을 나오고 연봉을 많이 받는 대기업에 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는 이 시대에 다른 축복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땀 흘리며 농사짓는 그 모습이 축복이며, 자신과 가족을 위해 고단한 노동의 삶을 살다가 간 평범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이 '위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나는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목사이지만 노동자로서의 삶이 위대하고 값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목사보다는 가난한 농민 교인과 시장에서 장사하는 할머니 교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목사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노동하는 목사의 길을 계속 가고자 한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