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당한 성군, 개신교인 앙리4세

[ 땅끝에서온편지 ] 프랑스종교개혁<8>-

이극범 목사
2017년 07월 03일(월) 10:32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위대한 지도자들은 나폴레옹 보나파트르 와 샤를 드골을 꼽는다. 나폴레옹은 루이 16세를 처형함으로 부패한 부르조 왕조를 종식시키고 공화 정치로 바꾸었고 드골 대통령은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고 국민 투표에 의해 약 7년에 걸친 알제리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를 거슬러 중세에는 앙리4세를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부르봉 왕조의 시조이면서 백성들로부터 '선량왕 앙리'라는 별명을 얻기까지는 지루한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고 신앙의 자유를 가져오게 했고 사회적 경제적 개혁의 성공으로 생활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선량한 왕이 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 시기는 징 칼뱅이 제네바에서 서거한지 25년이 지난 뒤였다.

앙리는 종교적 소수파인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위그노들의 수장으로서 당시 프랑스 내의 많은 종교 전쟁을 지휘했고, 1589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뒤에도 믿음의 자유를 부여하는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내전을 종식시킨 뒤 프랑스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위그노이자 나바라 국왕 시절부터 그를 보필한 쉴리 공작(Sully)을 전격적으로 재상으로 기용해 오랜 전쟁으로 파산 상태였던 프랑스의 재정을 크게 개선시켰을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발전시켰다. 지나치게 과중했던 농민들의 세 부담을 줄이는 대신 귀족들의 세 부담을 늘리고, 위그노들이 대부분이었던 프랑스의 상공업자들이 다시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면서 직물 산업 유리 공업 등이 다시 발전했다. 재무, 농업, 토지 관리에 있어서의 쉴리 공작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도로망 삼림 운하 건설과 현재의 캐나다 퀘벡 주 개발 등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현재 젊은이들이 거닐며 즐기는 퐁뇌프 다리는 그 때에 건설되었다. 

앙리 4세는 백성들에게 대왕으로도 불리웠으며 그가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하였는가는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는 현실이 되었다. 수닭은 카톨릭의 상징기도 하며 현대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다. 그는 성군으로서 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나 파리에서 로마 카톨릭 교인의 손에 암살당하였다. 그가 1610년 살해될 때까지 20차례 이상 암살 기도에 시달렸고 여러 차례 구교와 개신교로 개종을 번복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연속되고 있었다. 특별히 1572년에 그의 모친이 사망한 후 8월 12일 그의 결혼식에 피비린내 나는 살인극을 맨 처음 경험한 상처가 있었다. 사실 개신교인 이었던 앙리 4세는 카톨릭인이던 마르그리트와의 혼인으로 두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한 상징적인 결혼식이었다. 그 결혼식에 참석한 극단주의 카톨릭 신자들은 프랑스 왕국과 나바르 왕국의 귀족 개신교인들이 참석한 것을 미리 알고 결혼식 도중에 한 명도 남김 없이 모두 죽이려는 음모를 했으며 결국 8월 24일날 '성 바돌로메 대 학살'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당시 앙리 4세는 개신교인이었지만 왕자의 신분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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