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현장에서 한국교회를 생각하다

[ 기획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중해 크루즈 성지순례 및 종교개혁지 탐방(완)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7년 06월 27일(화) 10:15
▲ 베를린 장벽 인근에서 기도회를 한 후 포즈를 취한 순례단.

【동행취재=표현모 기자】 한국기독공보와 함께 하는 지중해 크루즈 성지순례 및 종교개혁지 탐방은 크루즈 여행을 통한 바울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 한 축이었고,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이 또다른 한 축이었다.

독일 국경을 넘어 본격적인 '루터 루트(Luther route)'로 들어서자 여행은 비로소 진정한 순례로 변했다. 

루터가 지상의 권력 앞에 홀홀단신으로 굳게 서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보름스를 지나 여행 11일째 도착한 곳은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城)이었다.

바르트부르크성은 11세기 경 세워진 군사 캠프였으나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제국 추방령이 최종 판결로 결정되자 그의 지지자들은 바트 리벤스타인 숲에서 루터를 납치한 것처럼 꾸미고 그를 이곳으로 숨겼다. 여기서 그는 '융커 외르크'라는 이름을 쓰며, 머리카락과 수명을 길러 변장했다고 한다. 이곳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이 은둔의 기간 동안 루터가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신약성경'을 기초로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가 성경을 번역한 기간은 11주로,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초인적인 힘을 기울여 성경번역에 임했다. 그는 당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시련을 주셨고 그로 인해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고 토로할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극심했던 모양이다. 

바르트부르크성 내 그가 성경번역시 사용한 방 벽에는 아직도 희미한 잉크자국이 남아있다. 쫓기는 몸, 고립된 상황에서의 루터가 악마의 환영에게 잉크병을 던졌다는 그 자국이다. 당시 루터의 편지에는 "나는 잉크로 마귀와 싸웠다"는 기록에서 만들어진 상상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지만 벽 한복판의 잉크자국은 사탄에게 저항하는 종교개혁가의 강인한 의지를 상징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순례단은 바르트부르크성을 떠나 에어푸르트로 향했다. 에어푸르트에는 루터가 수학한 에어푸르트대학이 있는 곳으로, 1379년 설립된 독일어권 지역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루터가 1501년 입학해 16학기를 수학한 이곳의 교정을 밟으며, 순례객들은 이곳을 거느렸을 500여년 전의 젊은 루터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어 인근의 성마리아 대성당으로 이동했다. 대성당은 루터가 1507년 사제 서품을 받은 곳. 이 성당 입구에는 걸인이 구걸을 하며 앉아 있었다. 차로 돌아오는 길 순례단 중 가장 어린 일곱살 김우진 군이 눈물을 왈칵 쏟았다. 이유인즉슨 성당 앞의 구걸하던 아저씨가 걱정된다는 것. 우진이는 할머니 유효순 권사의 손을 끌고가 그 불쌍한 아저씨에게 기어이 돈을 쥐어주고 와서야 눈물을 겨우 그쳤다. 동심에서 나온 순수한 행동이었지만 우진이의 모습은 루터의 발자취를 쫓는 순례단에게는 뭉클한 감동과 메시지를 주었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드가 '무지개'라는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 표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루터 루트의 하이라이트는 12일째인 아이슬레벤과 비텐베르크를 방문한 지난 7일의 일정이었다. 이 두 도시는 이름 앞에는 공식적으로 '루터 도시(Lutherstadt)'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루터와 가장 깊은 연관을 가진 곳이다. 이날 오전에 도착한 곳은 루터의 생가와 사망한 집,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설교한 안드레아스교회가 있는 아이슬레벤. 

루터의 탄생과 죽음이 있었던 도시 답게 시청 앞 광장에는 커다란 루터의 동상이

▲ 비텐베르크 성 교회. 루터는 이 문에 95개조 논제를 붙였다.

서 있었다. 이날은 특별히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페스티벌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렬한 루터 할아버지의 동상 아래서 아이들은 미니 기차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자신들의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500년 전의 종교개혁가 루터가 지금도 독일인들의 삶의 일부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잔치 속에서도 아이슬레벤 시에서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아 내건 표어는 의미 심장했다. 'Reformation geht weiter.(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순례에 참여한 한명 한명은 개혁의 본질을 담고 있는 이 표어를 보며,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하고 있는 이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한 현 시대에 이뤄야 할 종교개혁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으리라.

아이슬레벤에서 약 111km를 이동해 루터 종교개혁의 최고 하이라이트인 비텐베르크로 이동했다. '루터 도시(Lutherstadt)' 비텐베르크는 루터가 1511~1546년 죽기 전까지 약 35년간을 활동했던 종교개혁의 본 무대다.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붙인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문에 다다르자 순례단은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감격으로 가득찼다. 성 교회의 첨탑에는 루터가 작사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순례단은 찬송가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95개조 논제가 붙은 문은 당시에는 목조문이었으나 1760년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청동으로 문을 만들고 그 위에 95개조 논제를 기록하게 했다. 문 위의 그림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좌측에 루터, 우측에 멜란히톤이 그려져 있다. 

성 교회 안에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시신이 2m 밑에 안장되어 있다. 루터의 추종자로 종교개혁을 가장 가까이서 도왔던 멜란히톤 또한 루터와 함께 독일인과 세계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1518년, 21세의 나이로 비텐베르크 대학에 초빙되어 '독일인의 선생'으로 추앙받는 멜란히톤은 평생 철학, 언어학, 성서학 교수로 일하면서 교회 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 상황을 개혁시켰으며, 1521년 종교개혁 교과서로 인정받는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서 '신학요론(Loci communes)',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기초해 개신교 교리를 확정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 비텐베르크 시 광장에는 루터 동상이 서 있다. 순례단이 방문한 날에는 광장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한편, 이날 루터 종교개혁의 핵심을 경험한 감격 속에서 베를린으로 이동한 순례단은 베를린 장벽이 있는 공터에 모여 기도회를 열었다. 순례단은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은 신앙인으로서 나와 가정, 교회와 일터, 나아가 국가와 세계를 변혁시키는 깨어있는 교인으로서 날마다 개혁하며 살아갈 것을 위해 기도했다. 아울러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진 현장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지난 5월 27~6월 9일까지 13박 14일의 일정 동안 순례단은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초대교회부터 중세시대까지 세계사의 중심이었던 지중해를 탐방하고, 아울러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지 탐방을 했다. 

이번 순례에 낙도 목회자로 초청되어 참가한 장경화 목사(신안벧엘교회)는 "이번 여행은 주님이 특별히 허락해주신 재충전과 은혜의 시간이었다"며 "이 기간 동안 모든 참여자들은 '우리'가 되는 법을 배우고, 종교개혁 500년을 맞이해 바울과 츠빙글리, 칼빈과 멜란히톤, 루터 등 신앙의 선배가 던지는 도전 속에서 우리가 이 시대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을 하는 시간이었다. 돌아보니 감사만 남는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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