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권력에 맞선 루터의 삶, 깊은 감동의 순례

[ 기획 ] 종교개혁500주년 기념 지중해 크루즈 성지순례 및 종교개혁지 탐방(2)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7년 06월 21일(수) 13:42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가 서서 변론했던 곳.

【동행취재=표현모 기자】 '정 들자 이별'이라는 말처럼 6월 3일 일주일간 순례단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던 크루즈 로얄 캐리비안 '프리덤 오브 더 씨즈(Freedom of the Seas)'와 헤어져야 할 시간은 그야말로 금방 다가왔다. 이제 크루즈 여행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육로 관광이 시작된 것.

지난 6일간 크루즈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기항지를 오가며 여행했던 순례객들은 친숙해진 배와 작별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크루즈를 통한 바울의 여정을 찾는 것과 함께 이번 여행의 핵심 테마였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지난 2일 프랑스 빌프랑쉐와 니스를 거쳐 마르세유 항구에서 하선한 순례팀은 샤모니 몽블랑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 취리히, 다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를 거쳐 독일로 가는 여정 속에 있었다.

'트래블(travel)은 트러블(trouble)의 다른 말'이라는 공식이 여행 8일째인 지난 3일 크루즈 하선 및 샤모니 몽블랑을 향하는 도중 발생했다. 156명이라는 많은 인원의 하선 수속을 밟는 시간이 예상시간보다 2시간이나 더 많이 소요된 것. 서둘러 출발했지만 교통상황까지 여의치 않으면서 시간이 더욱 지체돼 점심시간에 예약한 식당에 가지 못하자 순례팀은 임시방편으로 휴게소에 들러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샤모니 몽블랑에 도착한 시각도 예상시간을 훌쩍 넘겨 이미 몽블랑으로 올라가는 기차는 끊어진 상태. 몽탕베르산에 올라 몽블랑의 아름다운 정경을 바라볼 꿈에 부풀었던 순례객들의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찼다. 

순례객들의 아쉬움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본보 스태프들은 긴급하게 회의를 통해 다음날 제네바 시내 관광 일정을 변경, 인터라켄의 리더호른산에 올라가 융프라우의 풍경을 감상하는 일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일정이 변경되는 관계로 다음날 주일예배 장소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주일을 맞은 순례단은 버스 안에서 각 호차별로 예배를 진행했다. 비록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드린 예배였지만 순례단은 기도와 찬양, 설교, 헌금 등 모든 예배의 전 과정을 최대한 경건하게 지켰다. 여행 중 두번의 주일예배에서 걷힌 헌금은 모두 281만5492원이나 될 정도였다. 이번에 모인 헌금은 전액 총회 창립 100주년 기념관 건립을 위한 기금으로 전달키로 했다.

▲ 보름스의 종교개혁에 기여한 12인의 종교개혁비.

이날 오후에는 취리히로 이동해 또 다른 개혁가 츠빙글리 목사가 개혁을 주도했던 그로스뮌스터교회를 방문했다. 취리히에서는 이외에도 귀족 부인들을 위한 성당인 프라우민스터, 종교개혁 이후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지어진 성페트로교회를 방문했다. 현지 가이드는 국교가 기독교인 스위스에서는 국민들이 종교세를 내고 국가 소속의 목사와 신부들은 종교청에서 사례비를 받고 있음을 설명했다. 저녁 7시가 되자 이곳 저곳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현지 가이드는 스위스 교회들이 어디서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지금도 매시간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고, 국민들도 이를 스위스의 오랜 전통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분위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여행 10일째인 6월5일에는 본격적인 종교개혁지 순례가 시작됐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에서는 칼빈이 목회하던 부끌리어개혁교회와 칼빈이 사택으로 썼던 건물을 방문했다. 스트라스부르그는 프랑스의 6대 도시로 유럽평의회와 유엔인권재판소 등이 있는 일명 '자유의 도시'로 불리는 곳. 칼빈의 종교개혁 당시에도 스트라스부르그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위그노와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몰려왔던 곳이다. 칼빈 또한 제네바에서의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와 마틴 부처를 만나 자신의 교리와 성서해석의 틀을 다듬었다. 칼빈은 종교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이들과 상공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이곳에서 난민들을 위한 목회를 하기도 했다. 또한 칼빈을 지지하던 이곳의 상공인들은 세계로 뻗어나가 자신들의 기술을 전파했고, 이러한 과정들은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는 칼빈과 마틴 부처의 유적도 중요하지만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흔적도 많은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덕분에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단 2주만에 전 독일에 퍼질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로 인한 인쇄술의 발달은 일반 대중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었던 것. 종교개혁이 단순히 한 사람의 신앙과 열정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그를 도운 조력자들과 이를 뒷받침한 열렬한 지지자들, 그리고 사회상황과 과학의 발달이라는 역사의 톱니바퀴가 정확히 맞아 떨어져 이뤄진 것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순례자들은 세계의 역사가 하나님의 경륜(經綸) 속에 있음을, 하나님은 자신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 이동하는 차량에서 드린 주일예배.

5일 오후에는 독일로 입국해 본격적으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행보를 추적하는 순례의 길을 시작했다. 먼저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한 순례단은 이곳에서 하이델베르그성에 도착, 관광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바라본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은 괴테, 헤겔,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거닐며 사색에 잠겼던 곳이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그를 거쳐 약 50km를 이동해 루터의 유적지 중 첫번째 당도한 곳은 보름스였다. 보름스는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열린 제국회의에서 루터가 사흘간 심문을 받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를 심문한 요한 에크 대주교는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그러나 루터는 "저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이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결과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법외자(法外者)'로 선언, 누구든 루터에게 위해를 가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름스의 당시 제국회의가 열린 곳에서는 루터가 서 있던 자리에 큰 철 신발이 설치되어 있다. 당시 루터를 정죄했던 제국회의의 결정으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지금 보름스의 시민들은 황제나 당시의 교황이 아닌 거대한 권력에 맞서 하나님 한분만 의지해 홀로 서 있던 루터를 기억하고 있었다. 잔디 밭 위의 빈 신발은 백마디의 설교 보다 깊은 감동을 순례객들에게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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