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6월 5~1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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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02일(금) 16:55

월-갇힌 자를 놓아주신 그리스도
본문 : 눅 4:18~19
찬송 : 348장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계속적으로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었다. '성령으로'라는 말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눅 1:35)." "세례 받으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셨다(눅 3:22)."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셨다(눅 4:1-13)." "성령의 능력을 받아 갈릴리로 오셨고 사역하셨다(눅 4:14)."
오늘 본문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오신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예배하게 되었다. 당시 회당예배 순서는 쉐마(신 6:4-9)의 고백, 기도 드림, 모세오경을 7인 이상이 윤독, 선지서의 낭독, 설교, 제사장의 축복 순이었다.
본문은 예수님이 이사야의 말씀을 낭독하고 이어 설교한 내용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이 말씀은 예수의 사역에 대해 예언한 말씀이다. 메시야가 사역을 하시게 될 때 주어지는 선물을 열거한다. 
첫째,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말이고, 죄의 포로 된 인류를 해방시켜주고 영적인 자유를 주신다는 말이다. 
둘째,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한다. 70인 역 번역자들은 당시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깊은 지하 토굴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을 눈 먼 자로 묘사했고, 그들이 풀려나는 것을 눈을 뜨는 것으로 이해했다. 메시야의 오심으로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셋째,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한다. 이 부분은 누가에 의해 추가했다고 보여진다. 누가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보고 구약을 근거해서 추가한 것이다. 메시야의 사역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읽고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설교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 모든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누구든지 온전하게 회복되어 살아가게 되었다. 음행 중에 잡힌 여인(요 8장),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눅 18장),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요 20장),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요 21장)가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만날 때 갇혀 있는 환경에서 해방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음생활이 느슨해져 있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옵소서. 예수만이 나를 갇힌 환경에서 놓아주실 수 있음을 믿고 예수님을 만나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오진 목사
정동교회


화-약한 자로 강하게
본문 : 행 4:13~22
찬송 : 393장

2012년 미국의 텍사스 주 리치먼드 시장을 지낸 무어가 92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소식이 워싱턴포스트지에 실렸다. 그는 무려 63년간의 최장수 시장 기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1949년 9월 시장 보궐선거에서 시장으로 선출되어, 2년 임기의 선거에 32번 연속 당선되었다. 민심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에 계속 당선된 비결이 무엇일까? "나는 60년 동안, 단지 두 가지 원칙을 지켰습니다. 할 수 있는 일만 약속하는 것과, 둘째는 거짓말 일색인 정치판에서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민족혼을 일깨운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7년에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훈시한 내용이다. "왜, 우리는 일본에 민족의 권한을 빼앗겼습니까? 거짓말 불감증 때문입니다. 중국산 인삼을 고려 인삼으로 속여 팔며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더라도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는 거짓말이 탄로가 나면 농담이라고 하는데 농담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꿈에서라도 성실을 잃었다면 통회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살 길은 성실과 정직이다.
사람은 인정받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을 포장하고 위선의 가면을 쓰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은 실수하면 실수한대로, 죄를 범한 그대로 적나라하게 소개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변화시켜서 사용하시는지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치자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몰려왔고 5000명 이상이 예수님을 믿었다. 그 일로 인해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두 사도를 죽이고 싶어도 백성들로 인해 협박만 하고 놓아 주었다.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했다. 며칠 전만 해도 베드로는 작은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했는데, 이러한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19절의 '하나님 앞에서'이다. '앞에서'는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과 '눈'이라는 뜻의 '옵스'가 합성된 '에노피온'으로 하나님의 눈을 의식했다는 뜻이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부인할 수 없는 앉은뱅이가 일어선 증거를 보면서도 두 사도를 죽이려고 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누가는 21절에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라고 기록하여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백성들의 눈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성령의 인도받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믿음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성령의 인도받는 삶으로 연약한 우리들이 영향력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학수 목사
장위중앙교회


수-제자도 사무일유
본문 : 눅 17:7~10
찬송 : 459장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종의 생활을 비유로 가르쳐주신 이상적인 제자의 삶,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제자의 모습이다. 제자는 사무일유(四無一有)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먼저 종으로 비유된 제자는 없는 것이 많다.
첫째, 자기 시간이 없다. 군복무가 쉽지 않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자기 시간이 없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좀 쉬려 하면 "집합!", "동작 그만!"이란 소리를 듣는다. 군복무보다 더 힘든 것이 종으로 사는 것이다. 비유에 나오는 종은 아침 일찍 바깥에 나가 하루 종일 밭에서, 들판에서 일을 했다. 한가로운 시간,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제자에게 하루 24시간 전체는 주님을 위해 일하는 시간이라는 말씀이다. 둘째, 우선권이 없다. 사극을 보면 왕은 언제나 신하들보다 높은 곳에 앉고 항상 맨 앞에서 걷는다. 왕에게 우선권이 있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보다 앞설 수 없다. 언제나 주인이 먼저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종은 무척 시장할 것이다. 그래도 먼저 먹을 수 없다.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 시중들고 그 후에 먹고 마셔야 한다. 제자에게 우선권은 언제나 주인이신 예수님이다. 셋째, 칭찬이 없다. 종은 일하라는 명을 듣고 하루 종일 일했다. 시장하지만 꾹 참고 주인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옆에서 서빙을 한 후에야 겨우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칭찬 받아 마땅한 종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게 하겠느냐?"며 부정적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을 하신다. 결코 칭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제자는 순종하고 충성해야 하되 결코 칭찬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무슨 대접을 받더라도 섭섭해 하지 않아야 제자라고 하신다. 넷째, 자기 사정이 없다. 고대사회에서 종은 '말하는 도구'였지만 분명 사람이다. 종도 피곤하고 종도 컨디션이 나쁠 때가 있다. 그런데도 종은 자기 사정을 말할 수 없다. 왜? 종이기 때문이다. '아홉 글자'권사님이 계시다. 나만이 아는 그분의 별명이다. 급한 심방 때 연락을 드리면 언제나 대답은 한결같다. "예, 목사님 지금 갈게요." 정확히 아홉 글자다. 궁금해서 "어떻게 전화 드릴 때마다 그렇게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주님의 종이 부르시는데 그 말밖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하셨다. 이분이 주님의 종이시다.
반면 종에게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고백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시고 본을 보여주신 '제자도 사무일유'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제자라면 마지막 날에 반드시 들을 약속의 말씀이 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오늘의 기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사무일유의 제자도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무종 목사
성광교회


목-지팡이를 던져라
본문 : 출 4:2~4
찬송 : 349장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장면 중에 한 부분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애굽에서 이미 좋지 않은 경험, 실패의 경험을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다시 애굽으로 즉, 실패를 경험하게 한 그 자리로 다시 가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에서 히브리 사람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한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즉, 누가 너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웠다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미디안으로 도망치기 전 모세의 실패의 경험이 지금 하나님의 부름 앞에 선 모세를 주춤거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묻는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곧 하나님의 부름 앞에 선 모세가 판단하는데 있어서 가장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두려워하고 주춤거리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그저 "지팡이를 쥐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모세의 대답에 하나님은 지팡이를 던지라고 말씀하시고 지팡이를 던지자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다.
모세가 쥐고 있던 지팡이는 무엇인가? 바로 양을 치는 데 쓰는 목동의 지팡이이다. 어제도 그랬고 그 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지팡이를 던지자 이미 생명이 죽어버린 나무가 생명으로 꿈틀대는 것이다. 또한 그 꿈틀대는 뱀의 꼬리를 잡자 순식간에 다시 자신이 매일 같이 쥐고 다니던 지팡이로 변한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모세에게 귀한 것을 가르쳐 주신다. 지금까지 자신의 실패한 경험 때문에 머뭇거리는 모세에게,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신 것이다. 내 손에 있을 때는 그저 어제와 같은 생명이 사라진 고목 지팡이이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던질 때에 더 이상 고목 지팡이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 역시 손에 쥐고 있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던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언제든지 그것을 다시 내 손에 쥐면 그것은 다시 지팡이로 변한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매일 나타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매일 같이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던져야 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 앞에 던져야 하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열등감과 죄책감에 갇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도 주저하며 두려움에 허우적거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믿음은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부끄럽고 실패로 얼룩진 우리의 열등감 조차도 하나님께 맡기길 원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오늘의 기도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 주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규성 목사
서광주교회


금-중보자이신 예수님처럼
본문 : 딤전 2:1~5
찬송 : 582장

최근 노회에서 진행하는 목회자들을 위한 수련회에 다녀온 일이 있다. 동역하는 사역자가 없고 성도들은 교회에서부터 먼 거리에 살고 있거나 또는 직장에 매여 있어 담임목사가 없는 터에 새벽기도 시간을 지켜달라고 부탁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다.
개인 일정 또한 수련회도 다 못 마치고 슬그머니 빠져나와 신병 훈련을 끝내고 수료하는 아들에게 가는 일이 이어져 있다 보니 수요 예배 시간조차 시간에 맞춰 가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또 하필 거동이 많이 힘들어지신 친정어머님 생신날이기도 했다. 홀로 살고 계시는 어머니의 집은 아들의 훈련소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애타는 심정으로 늦은 시간 고속도로를 달리며 교회를 향하고 있는데 문자 한통이 날라 왔다.
"목사님, 홀로 성전 지키며 은혜 많이 받고 성전 문단속하고 집에 가고 있어요. 교회는 평안하구요 걱정 마시고 조심히 올라오세요." 심히 작은 개척 교회의 목사에게 주시는 강 같은 은혜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후 지금까지 늘 사람을 찾으신다. 대체로 한 사람을 찾으신다. 어쩌면 마음에 합한 사람이 많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겠으나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는 취향이 있으신 것 같다.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우주적 사건을 일으키신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 거리로 급히 다니며 사람을 찾되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아내라고 하셨다. 그 한사람을 인하여 성읍을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이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성의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성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그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했으나 결국은 찾지 못하였기에 그들 위에 진노의 불을 쏟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고 찾으시는 그 한사람이 성읍을 살리게도 하고 멸하게도 한다는 말인가. 실로 그렇다. 한 사람의 위력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한 사람은 진실히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의 진실함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돌이키게 할 것이다. 또한 그가 행하는 정의는 공동체를 세우는 정의여야 하고 그가 구하는 진리는 사람을 사탄의 올무에서 풀어주는 진리 곧 자유케 하는 진리여야 한다.
오늘 본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진실함으로 중보기도 할 것을 권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너진 틈을 막아서기를 목숨을 던져 이루어 내신 예수님처럼,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 진실된 한 기도자의 중보기도라는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우리 삶에 평안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마음의 매무새를 단정히 해보자. 6월 호국의 달에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해 힘껏 기도함으로 진실히 중보하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작은 예수가 되어보자.

오늘의 기도
이 시대와 국가와 민족 앞에 예수님 닮은 진실한 중보자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영주 목사
거룩한말씀성서교회


토-자기 십자가
본문 : 마 10:34~39
찬송 : 429장

가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말씀들을 하신 것 같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군중들이 외친다. "우리의 임금 되어 주소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소서." 이런 군중들을 앞에 놓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신다. 그러자 "이 말은 심히 어렵도다"라고 하면서 다들 가버린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던 젊은 관원이 예수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에, 근심 띤 얼굴로 돌아간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도다." 마침내 한 제자는 묻는다. "구원 얻을 자가 적으니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몇 명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시지 않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갈릴리 사람들은 화평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랐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에게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며, 예수님은 이들을 실망시킨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는 화평을 얻는 바른 길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두 번째로 십자가라는 말은 결코 물질적인 고통, 인간적이며 일반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가 뜻하는 것은 '잃어야 얻는다'는 구체적인 사실이다. 또한 자기 십자가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누구나 교만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향락과 자기 정욕에 사로 잡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리스도를 얻고, 인생의 승리를 이루려면,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한다. 이런 것을 버리려는 자기와의 싸움이 자기 십자가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신다. 원수는 바로 가정에 대해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욕망이 끄는대로 사랑하는 내 마음이 원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져야할 십자가는 가정을 떠난다, 버린다는 말이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가정에 대한 나의 바른 자세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가정에 대한 나의 자세가 성경적이냐 아니냐가 문제다. 또 자기 십자가는 진짜 죽음을 의미한다. 자기 십자가가 의미하는 죽음은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절대 사랑과 순종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나의 한 평생의 삶이다. 죽어야 살고, 잃어야 얻는다. 스스로 죽는 것이 자기 십자가이다. 스스로 죽고자 할 때 예수님이 살리신다.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한다. 부활의 능력이 항상 함께 하면서 부활의 생명력을 일으킨다. 부활의 생명력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인생, 가문, 역사를 반드시 일으킨다.

오늘의 기도
이미 은혜와 복을 받았으니 내 몫의 십자가를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호 목사
성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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