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의 후예들

[ 논단 ]

황승룡 목사
2017년 06월 02일(금) 10:17

황승룡 목사
호남신학대학교 전 총장
 

금년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된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본 논단에서는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정신과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교회와 삶속에서 그 뜻을 조명하고자 한다. 특별히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을 살펴보고자 함은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이 장로교회의 신앙과 정신의 뿌리요, 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쯔빙글리(Huldrich Zwingli, 1484~1531)에 의해서 그리고 칼뱅(Jean Calvin, 1509~1564)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쯔빙글리가 가톨릭과의 전투에서 일찍 전사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칼뱅에 의해서 이뤄졌다. 그래서 칼뱅을 개혁신학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 교회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 부르는데, 이는 성경의 원리에 따라 철저하게 개혁하였다는 점에서 이렇게 부른다. 루터가 성경에 위배된 것을 교회에서 제거했다면, 칼뱅을 중심으로 한 스위스의 개혁운동은 개인의 생활까지 개혁했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제네바에서 칼뱅이 진행한 도덕적 개혁이다. 당시 제네바는 인구 1만 3000여 명의 극도로 타락한 도시였다. 그래서 공창이 많아 공창지대를 만들기도 하고, 한 사람이 한 첩만 두자고 시의회가 결의하기까지 했다. 칼뱅은 이런 제네바에서 수많은 술집과 공창을 제거하기 위해 강제적 조치를 취했으며, 이 외에도 카드놀이, 불경건한 노래 등을 금했다. 

이뿐 아니라 허례, 허식, 사치를 금하고 근면, 검소의 단순한 생활을 권했다. 칼뱅의 이 같은 치리를 신정정치(theocracy), 성경에 의한 정치(bibliocracy), 그리스도의 통치(Christocracy)라 부른다. 칼뱅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한편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총에 의해 칭의를 얻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화를 이루는 삶이었다. 그렇게 칼뱅은 루터보다 성화를 한층 더 강조했다. 그래서 칼뱅을 성화의 신학자라고도 한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3권(1559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에서 1장 성령, 2장 신앙, 3~5장 참회, 6~10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즉 성화를 다루고, 11~18장 칭의, 19장 기독교인의 자유, 20장 기도, 그 다음으로 예정과 종말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순서 배열이 의미하는 것은 성령이 신앙에 우선하며, 신앙은 신앙의 두 부분인 칭의와 성화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칼뱅은 '신앙만으로서의 의가 행실을 마비시킨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비난에 응답한 것이다. 

칼뱅이 이와 같이 성화를 중시한 것은 성화가 개신교회에서 등한시 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는 곧 자비로운 하나님의 사죄의 선고와 신앙의 새로운 복종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앙으로 그리스도인이 의로워지면, 그는 새로운 복종의 표시로 선한 행위를 필수적으로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는 서로 구분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칼뱅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의 통일된 삶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칼뱅은 입술로만 복음을 시인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분노하며 다음같이 말한다.

"복음은 혀의 복음이 아니고, 생활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다른 학문과 같이 단순히 인식과 기억으로써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인간에 관계돼야 한다.(기독교강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참된 회개의 결과로써 마땅한 것인바 그리스도와 같이 옛 사람이 죽고(mortification) 새로운 사람으로 사는 것(vivification)이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사회는 자본주의 논리와 시장경제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이런 때에 교회는 거룩성을 추구하여 우리 사회의 좌표가 돼야 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신앙을 거룩한 생활의 모습으로 보여줘야 한다. 거룩은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아닌 당위적 명령이며 삶의 대강령이다. 특히 개혁교회의 후예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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