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교육개혁 이야기 <11> 신학교육 개혁

[ 기독교교육이야기 ]

양금희 교수
2017년 05월 25일(목) 09:41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부의 교수였고, 그의 종교개혁 활동은 모두 신학교수의 신분으로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가 종교개혁 정신을 신학교육 안에서도 직접적으로 구체화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 당시의 신학교육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근거로 한 스콜라주의적 신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천사가 바늘 끝에 몇 명 올라갈 수 있나?"와 같은 형이상학적 논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루터는 그러한 공론들의 무익함을 비판하고,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교부들의 살아있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신학에 기초하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비텐베르크대학 신학부에 스콜라적 신학과목을 대폭적으로 줄이고 교부 신학 과목들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루터가 신학교육에서 그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성경이었다. 그는 스콜라주의적 신학도, 교부신학도 아닌 성경이야말로 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신학도들에게 주는 글에서 교부들의 신학은 유익함이 있지만 말씀에로 들어가기 위한 입문 정도로만 도움이 될 뿐이므로, 신학도들은 교부의 책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그는 신학박사 과정생들에게 신학박사란 곧 '성경의 박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신학박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성경의 박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주셔야 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요한복음 6장 45절을 인용하며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 (Theo didaktica)'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함으로써, 신학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학문이요, 따라서 하나님과 관계의 기반 위에서만 할 수 있는 학문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루터는 1518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에 헬라어 교수로 부임해 와서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루터의 오른팔과 같은 역할을 했던 멜란히톤의 영향을 받아 성서 언어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되었다. 멜란히톤은 외삼촌인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 로이힐린으로부터 어릴 때부터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우며 성장하였고, 21세에 비텐베르크에서 헬라어와 인문학 교수가 된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비텐베르크에 왔을 때 그는 루터로부터 복음을 배웠고, 루터는 그로부터 헬라어를 더 깊이 배웠다. 루터는 성경이 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면, 그 무엇보다 성서언어를 바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신학 자체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멜란히톤으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부 안에 성서언어 과목을 강화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평생 성경 해석과목을 가르쳤고, 그의 종교개혁 신학이나 교리도 성경해석으로부터 전개하였다. 멜란히톤은 신학도들을 위한 기독교 교의학책의 필요성을 느끼고 1521년 개신교 최초의 교의학 책인 '신학총론(Loci communes)'을 집필하여 가르쳤는데, 이것도 그의 '로마서 강의'의 기초 위에서 쓰여졌다.

멜란히톤의 신학총론은 지속적으로 성경과의 관계 속에서 수정 보완되면서 비텐베르크대학 신학부의 교의학 교과서로 자리 잡게 된다. 비텐베르크대학 신학부는 스콜라주의나 그 어떤 철학으로부터가 아닌 로마서, 요한복음, 시편, 예언서 등의 성경을 바탕으로 개신교 교의학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전통이 종교개혁 이후로도 개신교 신학교육에서 지속될 수 있게 하였다.

추상적 이론으로서의 신학이 아닌 살아있는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교부의 신학,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연구와 그로부터 전개되는 기독교 신학,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함, 성경을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성경언어의 강화, 루터와 함께 바뀐 비텐베르크대학 신학교육의 패러다임은 오늘 우리의 신학교육에도 여전히 하나의 길라잡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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