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를 기억하며

[ 논단 ]

오현선 교수
2017년 05월 18일(목) 09:21

오현선 교수
호남신학대학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과 선고가 있던 날 아침, 스메타나의 교향곡 '나의 조국'을 씨디 플레이어에 올렸다. 얀 후스(Jan Hus)의 개혁을 민중들과 함께 피땀으로 지켜낸 얀 지슈카(Jan Zizka) 장군의 역사적 원형이 내 조국의 의식에 분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몰다우(Moldau)'라는 2악장으로 더 알려져 있는 곡이지만 5악장 '타보르(Tabor)'의 이야기는 종교개혁 정신이 체코인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느끼게 하는 곡이다. 종교개혁자 후스의 후예들이, 가톨릭 교회에 저항하면서 싸웠던 결전의 도시 '타보르'가 스메타나 곡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성직자에게만 허용된 포도주를 빵과 함께 회중에게 모두 허락해야 한다는 두 가지 성찬, 회중이 읽고 부를 수 있는 성서와 찬송의 보급, 청빈한 교회를 주장하면서 교권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을 비판한 후스는 1415년, 로마 콘스탄츠공의회에 의해 화형을 당한다. 이에 후스의 후예 지슈카는 타보르라는 도시에서 농민, 여성들과 더불어 프로테스탄트 저항군을 만들어 가톨릭 십자군들에 맞서 싸워 큰 승리를 이루고 그의 개혁정신을 이어가고자 했다. 

후스의 종교개혁운동은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100년이나 앞선 개혁이었으며 그 자체로서 완성도 높은 개혁운동이었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농민과 여성이 개혁의 참여자로 함께한 이유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구교의 타락을 비판하지만 여성과 농민을 배제한 미완의 개혁이 한국교회에는 더 안전한 개혁의 모델로 채택돼 소개됐던 것으로 본다. 후스를 대표로하는 체코의 종교개혁은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으며 교권에 억압된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개혁이었기에, 체코인 모두에게 위대한 목사요, 신학자요, 개혁가로 기억되고 있다. 후스 서거 500주년이었던 1915년은 1차 세계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상을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중앙에 세운 것을 보면 체코 시민들이 얼마나 후스를 사랑하고 존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알곡같은 교회(마 3:12, 눅 3:17)는 그렇게 음악으로, 예술로, 신자들에게,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기억되는 것인가 보다. 복음은 그래서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평화, 정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것인가 보다.

주말마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노고는 헌법재판관들의 대통령 탄핵 인용을 이끌어 낸 동력이었으며, 여러 도시의 광장들은 살아 움직이는 민주주의의 학습장, 움직이는 역사교과서가 됐다. 권력을 가진 지배엘리트들의 힘이 아니라 시민들의 힘으로 부패정권을 심판한 경험은 한국 현대사에, 한국인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더 성숙한 민주주의적 발전을 이뤄나가게 될 것이다. 상식이 통하는 나라, 성실하게 노동하면 남다르게 잘 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은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의 경계를 넘어 우리 공동체 모두의 것이 됐다. 개혁은 교회 밖에서 이미 먼저 시작됐다. 

한편 탄핵 결정 다음 날, 필자는 '서울의 한 대형 교회가 합병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업이나 권력을 사유화하는 집단에서나 거론되던 합병 형태의 세습을 추진하고 있다는 일간지 보도는 종교개혁 정신의 계승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힘을 모으고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500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교회는 개혁의 주체였지만, 개혁의 대상이었음을 기억하자. 남성, 비장애인, 부자, 선주민, 권력집단에 친화적인 교회는 결코 개혁의 주체가 아닌 개혁의 대상일 뿐이다. 참된 복음을 선포하고 행한 교회와 사람은 교회를 넘어 역사가, 세계가 기억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사라졌음을(마 24:1~2)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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