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대 신대원 85기 '모교방문의 날'을 맞아

[ 기고 ]

석원식 목사
2017년 05월 16일(화) 15:31

싱그러운 계절 5월이다. 5월은 특히 모교와 스승을 떠오르게 하는 스승의 날이 들어 있는 뜻 깊은 달이기도 하다. 마침 5월에는 올해로 졸업 25주년을 맞이하여 신대원 85기(1992년 2월 졸업) 동기들이 모교 116주년 기념행사일에 초대되어 '모교방문의 날' 행사(5월 15일~16일)를 가졌다.

모교를 다시 찾는 동문 모두에게 이 날은 기쁨과 설레임이 가득한 날이다. 장신대 신대원 85기는 예년보다 수십 명이나 적은 숫자로 졸업했다. 이는 신대원 1학년 때 갑작스레 불거진 학교 이전안에 반대하여 학사일정을 거부함으로 동기들이 대량 유급 당한 까닭이다. 당시 신대원 원우회 임원들이 학교로부터 제적 등의 중징계를 당한 것에 비하면 나와 같은 평범한 동기들의 희생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었겠지만 이 사태로 많은 동기들이 본의 아니게 휴학이나 자퇴를 해야만 했었다.

독일에서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통합측 산하 한 신학대학교 교수직에 지원하였을 때다. 한 심사위원이 내게 신대원 1학년 2학기 성적이 모두 D, F로만 된 이유를 물었다. 학교 이전을 반대하는 시험 거부와 수업 거부로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 했지만 그 심사위원은 당시 장신대가 학교 이전 문제로 큰 내홍에 빠졌던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면접에 탈락한 후 당시 학교 이전 사태로 인하여 받은 낮은 학점의 과목들을 모두 포기하고 재신청하여 성적을 올리지 못한 점을 무척 아쉬워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나마 내 경우는 제 때에 졸업할 수 있었다. 임원도 아니었기에 내가 중징계 받을 일은 없었으며 낮은 성적 이외에는 학교 이전을 반대한다는 것으로 불이익이나 불편함을 크게 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시 유급을 당하여 어쩔 수 없이 한 해를 쉬어야만 했던 동기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시리다.

25년 전 졸업식에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신대원 졸업 후 이사회 측에서나 모교 측에서 한 번도 공식적으로 당시 학교 이전 문제로 희생당한 학생들에게 어떤 유감이나 사과 표시가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학교 이전에 관한 문제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서로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학생들의 대량 징계 사태가 일어난 것 하나만으로도 당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던 선생들로서는 무한한 책임을 가져야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만일 학교 이전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이후에라도 이사들과 교수들이 좀 더 학생들과 소통하는 자세만 보였더라도 장신대  역사 상 전무후무할 이 같은 대량 징계(1990년 5월 18일자 장신원보에 따르면 신대원만 해도 제적 3, 유급 124명이었고 학부 4학년 198명이 졸업유보, 제적 25명, 무기정학 및 신대원 입학 자격정지 5년이 14명이었다)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이 나갈 즈음엔 이미 새 정부가 들어섰을 때일 것이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새 정부는 그동안 선거로 인하여 갈기갈기 찢겨진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힘을 쓴다. 모교가 그동안 여러 면에서 발전하고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동문으로서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모교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적어도 당시 장신대에 속한 학생들의 많은 희생이 수반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 이를 생각한다면 학교 측에서 당시의 사태로 희생당한 학생들에게 이제라도 공식적인 유감과 위로를 표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를 통하여 당시 학교 이전 문제로 인하여 갈기갈기 찢겨졌던 동문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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