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다의 오해

[ 연재 ] 김희보 목사의 사순절 칼럼 진리와 자유

김희보 목사
2017년 03월 21일(화) 14:25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정녕 가룟 유다는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복음서는 한결같이 유다를 도둑, 사탄의 하수인으로 공격하고 있다. 유다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예수를 판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 나무에 목매어 죽었다. 그 나무 가지가 부러져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테는 '신곡'에서 유다가 지옥 맨 밑바닥에 갇혀, 악마대왕 루치펠로에게 질겅질겅 씹히고 있다고 하였다.
가룟 유다만이 나면서부터 탐욕스럽고 정직하지 못하며 간악했던 것은 아니다. 유다도 또한 다른 제자들처럼 가족과 재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더구나 다른 제자들이 북방 갈릴리 출신인 반면, 유다만 남방 가룟 출신이었다. 그런 악조건과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회계를 맡은 유다는 유능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았다고 보기에는 은 삼십은 너무 적은 액수다.

유다의 비극의 원인은 -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뜻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에 그린 메시야상(像)과 신앙관(觀)에 예수를 짜맞춰 해석하려 한 데 있다. 유다는 메시야를 구약의 시인과 선지자들이 생각했던 그대로 생각하였다. 즉, 외세(外勢)를 배제하고 다윗 왕국을 재건하여, 세계적 권력을 차지하는 정치적, 민족적인 지도자, 곧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한 세번째 유혹의 내용과 같은 것이었다.

좁다란 애국심과 자기 나름의 그리스도 해석은 항상 우리 신앙을 그릇되게 한다. 다락방에서 있은 최후의 만찬 때에 유다는 자리를 박차고 예수에게서 떠났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 13:30). 그것은 소망의 빛이라고는 반딧불만큼도 비치지 않는 캄캄한 밤이다. 영혼의 캄캄한 밤이었다.

유다의 배신 그리고 인간의 반역은 그리스도로부터 추방하는 것도 또한 파문(破門)도 아니다. 배반하고 반역하고 부인하고 도피하려 해도 그리스도는 버리지 않으신다. 주 예수는 배반한 유다를 향해서도 "친구여" 하고 부르셨다. 좁다란 민족주의와 자기 나름의 해석에 따라, 공산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목적을 그리스도 정신과 바꿔치기 한다 하더라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친구여" 하며 배신자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미국 여류작가 K. 포터의 단편에 '꽃 피는 유다의 나무'가 있다. '유다의 나무'는 유다가 목맨 나무의 종(種) 이름이다. 로라는 멕시코 혁명에 참가하지만, 모태 신앙이라 몰래 교회에 들어가 기도하곤 한다. 이념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던 로라는 대장에 의하여, 유다의 나무에서 딴 피가 흐르는 꽃을 먹는다. 대원들은 '살인자' 하고 이념 때문에 몸부림치는 로라를 규탄하는 것이다.

 

용천노회 은퇴
본보 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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