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 13~18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7년 03월 10일(금) 16:27

월-파이팅 하며 삽시다!
본문 : 잠 24:16
찬송 : 456장

모든 일에 다 성공하는 것이 반드시 축복은 아니다. 진짜 성공은 실패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5가지 지혜가 필요하다.

첫째, 원칙대로 살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삶과 생활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그 말씀이 내 삶의 기본이요 원칙임을 확신하고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한 절 말씀에 전 인생을 걸고 결단하고 순종하여 축복의 고지를 점령하시기 바란다.

둘째, 투쟁하듯 살지 말라. 삶의 프레임을 전투로 투쟁으로 보는 사람은 항상 불안하고 쫓기며 불행해진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서도 태어났지만 주님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투쟁은 혼란과 악이 들어오는 대문과도 같은 것이다. 사탄이 좋아하는 것은 다툼이다. 다툼의 출발은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강력하게 권면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관계를 통해서 온다.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충성의 기회를 통해 온다. 내 것을 조금만 포기하면 인생은 훨씬 행복한 인생이 된다.

셋째,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라. 쓰러질 때 다시 일어나야 성공으로 가는 문턱을 넘게 된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이 쓰러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의인이 일곱 번씩이나 넘어질 수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일곱 번 넘어진다는 것은 단순한 7회도 의미하지만 완전하게 넘어진 것도 의미한다. 그러나 주님 십자가 피 묻은 그 손을 붙잡고 일어서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씀한다. 일어서는 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넷째, 포기하지 말라. 가정생활이나 교회생활이나 사업이나 직장 등 많은 곳에서 우리는 포기의 유혹을 받고 산다. 사람이 포기할 때 많은 이유를 대지만 포기를 선택하는 것은 포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사실 불행도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올 수 없다. 포기의 반대말은 인내이다. 인내 없는 성공은 성공이 아니고, 인내 없는 응답은 감사를 모르게 한다. 믿음은 포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다섯째, 파이팅(fighting)하라.
적극적인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징은 담대함이다. 여호수아의 파이팅 담대함이 가나안을 점령한다. 다윗의 파이팅이 골리앗을 이겼다. 사탄은 우리를 위축하게 하고, 세상은 우리를 나약하게 보게 만든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시고 파이팅하게 하셔서 십자가 피 묻은 복음의 증인으로 들어 쓰신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 도전자의 정신으로 살아가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렬 목사
주광교회


화-나를 따라오라
본문 : 막 1:16~20
찬송 : 457장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할 때 주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가 깊어지고, 보다 더 주님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된다. 해마다 사순절을 맞으면서 '나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을 수 있는가?'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라면 그 길이 고난의 길이든, 영광의 길이든 따라갈 수 있느냐하는 질문은 제자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깁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신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네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들에게 가족이나 생업보다도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었다. 주님은 당신을 따라가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들에게 자기희생과 포기를 요구하신다. 마가복음 8장 34절 말씀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내 생각, 내 주장, 내 계산,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내가 세웠던 계획과 나의 삶의 주도권까지도 다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주님이 맡아주시도록 의탁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또한, 십자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게 감당하라고 주시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고 피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주님이 감당하라고 주실 때 순종함으로 짊어져야 할 사명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이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온전히 나를 부인하고 주님께 내 삶을 다 맡기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 나서야 한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네 사람은 제자가 되었다. 많은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다듬으시고 훈련시키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고 구원을 받았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으며 귀신과 모든 악한 것이 떠나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이들 모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아름다운 이름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예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이다. 오늘 주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신다. 제자가 되라고 명령하신다.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버리고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으로 응답하자.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자. 제자답게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도록 달려가자. 주께서 우리들을 다듬으시고, 훈련시키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오늘 '나를 따라오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주저 없이 순종하여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영기 목사
아산온유교회


수-예수님의 눈물
본문 : 요 11:32~44
찬송 : 412장

몇 번이나 울며 진한 눈물을 흘렸던 때가 언제였나?

힘겨운 인생을 살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경우는 절망에 부딪혔을 때다.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이, 부모님이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어찌 손 쓸 방법이 없다. 사람의 눈물은 절망에서 나온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눈물은 다르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음을 아시고 유대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가셨다.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기록하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왜 우셨을까? 눈물은 이것을 하긴 해야겠는데, 감당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난다. 나사로가 죽은 것을 보고, 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럴 힘이 없을 때 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분명히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고도 하셨다.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나사로가 병들었고 죽으리라는 것이고,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날 것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우셨을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의 역사는 사랑에서 발산된다.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가 왜 능력이 있을까? 자식을 향한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가 어머니의 마음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아무 사심이 없는, 오직 사랑의 기도만이 드려지기 때문에 어머니의 기도가 힘이 있고 능력이 되어 자녀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며, 그 능력은 사랑에서 발산된다. 본문 33, 38절에 예수님 마음이 잘 나타난다.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심령에 비통히 여기고 우셨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의 눈물은 참된 위로가 되었고, 나사로를 살린 원천이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빠지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힘도 죄인을 향한 사랑의 힘이었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십자가는 있을 수 없다.

당시 예수님은 유대로 올라가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대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하여 피해서 온 상황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에게로 가자." 왜일까? 주님은 나사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에 돌에 맞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고, 이 사랑을 바탕으로 나사로를 살리셨다.

사랑의 기도를 드리라. 사랑의 눈물을 배워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주님은 원하신다.

오늘의 기도
사랑으로 십자가 지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희도 사랑으로 섬기며 눈물로 기도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종훈 목사
가나안교회


목-하나님을 아웃소싱하라
본문 : 삼상 17:45~47
찬송 : 585장

우리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교활한 사탄과 세상의 권세는 순전한 우리 신앙인들을 두렵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숙명처럼 여기고 악한 권세의 싸움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하거나 그냥 주눅이 든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가 막힌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아웃소싱이란 '어떤 기업이나 공동체가 특정 분야의 전문적인 일을 해야 하는데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내부에 없을 경우 그런 일을 잘하는 전문가를 외부에서 영입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이나 기업, 공동체가 보유한 능력이나 자원이 좀 부족해도, 해당 분야에 전문가가 없어도 아웃소싱을 통해 좋은 전문가만 영입하여 일을 맡기면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최고의 아웃소싱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웃소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아웃소싱하면 나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으로, 나의 부족함은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지혜로 대체된다.

다윗은 이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다. 아직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10대 후반의 청소년 다윗이 골리앗에게 도전했다. 다윗의 도전 뒤에는 놀라운 비밀이 하나 숨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하나님을 아웃소싱 했다는 사실이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날 골리앗은 자신의 체격과 힘과 전투능력, 무기와 방패를 의지하여 싸움터에 나왔지만,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다. 한 마디로 다윗은 하나님을 아웃소싱한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싸움이었다. 그 결과 천하제일의 용사 골리앗이 다윗에게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어떤 것도, 심지어는 악한 권세와 사탄조차도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가 치르는 모든 육적,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철저히 하나님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불리한 여건과 환경도 뛰어넘는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능력의 하나님을 아웃소싱하여 골리앗을 물리쳤던 다윗의 믿음과 지혜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아웃소싱하여 다윗처럼 승리하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원석 목사
보문중앙교회


금-응답 받지 못한 기도
본문 : 고후 12:7~10
찬송 : 300장

기도응답을 약속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불치병에 걸렸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그 고난을 해결 받기 위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한 기도'는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어렵다.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 올 때 그것 또한 기도응답이라고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사도바울이 자신의 육체적 고통이 낫도록 세 번씩이나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육체의 질병인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응답을 받게 되었다. 응답은 커녕 그것이 오히려 은혜라니 응답 받지 못한 바울의 기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로 영적 축복이 육적 축복보다 우선순위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에 속한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안전하고 강건하게 유지되기를 바라시지만 우리의 영적 상태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이겨 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다. 이러한 은혜를 받고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불평하기보다는 도리어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고난 가운데 있는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였다. 계속 기도하고 있지만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로 고난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기뻐한다면 구원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며 하나님은 더욱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둘째로 응답 받지 못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다.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없이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자신이 도덕적으로 잘 못살아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그 때도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위하여 기도할 때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다. 바울은 그것을 '내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말했다. 이런 고통을 허락하실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행해서가 아니라 바르게 행하시기를 원하시지 때문에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 때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통이 주어진다. 바울은 하늘나라에 다녀온 사실에 대해 교만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의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셨다. 스스로 고통을 자처한 일이 아니라면 '이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을 깨닫게 되면 그 목적을 이루시도록 자신을 맡길 수 있다.

오늘의 기도
고난 가운데 부르짖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영적인 일을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덕열 목사
은혜소리은성교회


토-선한 목자 예수님
본문 : 요 10:7~18
찬송 : 569장

나라의 지도자 때문에 온 국민의 마음이 서글픈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모두가 환영하는 지도자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의 미래를 맡기고 고달픈 현실을 위로할 만한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기도할 뿐이다. 교회도 나라와 마찬가지로 지도자다운 지도자를 원한다. 자기 자신보다 성도들을 더 사랑하고, 목사의 명예보다 하나님 나라의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를 성도들은 원한다. 다행히 오늘 말씀 속에는 그러한 지도자의 모델이 있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가 의지하고 배우고 따라야 할 지도자이다.

첫째로, 우리 예수님은 강도가 아니라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목자는 양의 문을 통하여 들어오지만 절도나 강도가 목적인 자는 문을 넘어서 들어온다. 목자는 양을 보호하고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들어오지만, 강도나 절도는 양을 훔쳐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들어온다. 목자는 양들을 구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지만, 강도나 절도는 도둑질과 죽음과 멸망을 가져온다. 양들을 희생시키려는 강도는 많지만, 양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목자는 어디에 있을까? 안타까운 것은 목자의 음성과 강도의 음성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자기 욕심을 따라 강도와 절도의 미혹에 빠지는 양들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목자의 음성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 양들이다. 오늘 우리 모두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즐겁게 따라가면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에서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될 줄 믿으시기 바라다.

둘째로, 우리 예수님은 삯꾼이 아니라 목자이시다. 삯꾼은 삯을 받고 임시로 고용되어 양을 돌보는 사람을 말한다. 그가 양들의 주인은 아니지만 삯을 받는 만큼 양들을 돌봐야 할 책임은 있다. 이리가 몰려와서 양들을 헤치려 할 때 양들을 지켜주는 것은 삯꾼의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러나 그는 양들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지는 않는다. 삯꾼은 그저 삯꾼일 뿐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삯꾼이 아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주인이다.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고, 그들의 음성을 아신다. 그 양들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 때문에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는 목자, 선한 목자이시다. 목자의 사랑이 양들의 생명을 지키고, 그 사랑이 양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한다. 그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누군가 위에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타자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리더가 진정한 리더임을 가르쳐 주신다. 억지로 순종을 요구하는 리더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사랑으로 순종을 이끌어내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맡겨도 될 만한 선한 목자가 누구인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시는 주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하며, 주님의 음성을 따라 살며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공철혁 목사
창조교회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